어린 시절, 가난은 우리 집과 꽤 오래 친숙했다. <아나톨의 작은 냄비>(이자벨 카리에 글그림)에 나오는 아나톨의 작은 냄비처럼 싫다고 떼어낼 수도, 못 본 척할 수도 없었다. 가난은 옆에 딱 붙어서 기를 죽이는 일등공신이기도 했다가 가족을 한데 묶는 중추이기도 했다.
'아파트에 살면 부자'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 살던 곳이 지방 소도시라 아파트라는 주택 구조가 흔하지 않았다. 학교 근처에 아파트 단지가 한 동 있었는데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는 높은 건물이 낮은 다른 집들을 다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학교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살던 나는 등굣길에 학교에 다가갈수록 함께 가까워오는 그 아파트가 햇빛을 역광으로 받을 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눈이 부시곤 했다.
국민학교 6학년 막 올라갔을 때였다. 학급 임원 선거를 하는 날. 성적순으로 남자 1, 2, 3등, 여자 1, 2, 3등, 이렇게 6명이 후보였다. 이미 남학생 1명이 반장으로 선출되고, 부반장을 선출할 차례였다. 부반장은 남, 여 각 1명씩 뽑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 셋 중 한 명은 무조건 뽑히게 되어 있었다. 각자가 나와서 간단한 후보 연설을 하고는 투표에 들어가기 직전, 선생님께서 한 말씀만 하신다며 전체 학생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학급을 대표하는 학생을 뽑는 중요한 일이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투표를 해야 하는 거야. 대표를 하려면 공부도 잘하고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어야 하지만, 대표 엄마께서 학교에 오실 일도 많고 학교 일에 협조할 일도 많으니까 가정 형편도 고려해야 돼. 그런 것을 생각해서 투표하도록."
여학생 후보들 중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그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면 더 나았을까.
학급 임원들 가정에서 학기 초에 교실 화분이나 청소용품도 들여주고 소풍 가면 선생님들 점심도 바리바리 싸들고 따라오던 시절이었다. 아이 셋을 양육하시느라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시던 우리 엄마는 학교 일에 신경을 쓰기 어려웠다. 그래도 철이 없었던지 난 우리 집이 다른 친구들보다 형편이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날 명확히 알았다. 내가 학급 임원이 되면 선생님이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차라리 친구들이 아파트에 살 던 두 여자 아이들 중 한 명을 뽑았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내 표가 더 많이 나와 버렸다. 선생님 얼굴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학기 내내 선생님 심부름을 더 열심히 하고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부류라는 걸. 아는 결핍의 냄새는 그 향이 짙어 애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맡아진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가난은 자신만만한 태도는커녕 다채로운 표정조차 쉽게 허락해 주지 않는다는 걸 친구를 보며 알았다. 가난은 해질녘이면 실물의 크기보다 더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처럼 그 크기를 자주 부풀렸다. 그렇게 그 친구를 보며 내 가난의 크기를 가늠했다.
새 반에서 처음 만난 그 친구를 보며 느꼈던 친근함은 그동안 꾹꾹 눌러 감추고 싶었던 내 치부의 드러남과도 같아서 좋은 건지, 불편한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몽실 언니 같은 머리 모양을 1년 내내 하고 다니던 친구. 그녀에게 엄마가 안 계시다는 것을 나는 언제 알았을까. 그녀에게서 느꼈던 냄새의 정체를 알게 된 날, 난 더욱 그 친구와 가까워졌던 것 같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와 어머니가 없는 아이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며 온기를 나누었다.
어렸을 때 공동 수돗가를 중심으로 사방형으로 다닥다닥 연결된 셋방살이 주택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여간해선 사생활을 지키기 힘든 공동 공간에 가까웠으나 사흘이 멀다 하고 각 방의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 나와 공동 수돗가로 패대기 쳐지곤 했다. 그렇게 가난은 민낯을 드러내는 일상의 폭력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간 날, 그나마 사는 형편이 좀 더 나아진 시절이었는데도 그런 집 구조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난한 나보다 더 가난한 모습으로 내 옆에 있던 친구가 위로가 되었던가.
그런데 그 친구가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전학을 가버렸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왜 간다는 말도 전해 듣지 못했다. 가난은 일시에 사람을 사람에게서 떼어 놓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으니까. 아쉬워도 어쩌지 못했다. 친구와 작별 인사라도 하며 실컷 울기라도 했다면 그 모든 걸 가난 탓으로 돌리진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들의 슬픔과 불행의 원인은 대게 '가난'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 집의 가난은 꽤 오래 지속되었지만, 그 시절의 가난이란 공동 수돗가를 둘러싼 방들처럼 비슷한 모양새로 닮아 있어서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딱 한 번, 가난이 또 나를 난처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아파서 조퇴를 했던 적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혼자 갈 수 있다는 내게 한사코 우리 반 반장을 동행시키셨다. 학교에서의 평등했던 친구 관계가 무게추를 잃고 휘청거린 것은 친구의 가난을 눈치챈 다른 친구의 흔들리던 눈빛 때문이었을까, 들키고 싶지 않던 치부를 내 보인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 몸이 말끔히 나았어도 그 마음은 꽤 오래 말끔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가난을 곱씹는 것은 오늘의 풍요로운 삶에 감사하기 위함이다. 물질적인 가난은 벗어날 수 있어도 정신적인 가난은 더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난이 우아할 수 있을까.
가난했던 그 시절에도 끝까지 내가 지키고 싶었던 우아(優雅)가 있었으니, 그것은 학교도서관의 '책'과 TV '토요 명화'였다. 그 두 가지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할 수 있었다. 지키고 싶은 우아한 조각이 있는 사람은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