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마법을 걸만한 사람, 호시탐탐 노립니다
요즘 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이들에게 글쓰기를 종용하는 재미에 들렸다.
그 첫 대상은 주 1회 만나는 미술 선생님이었다. 내 화실 선생님은 30대 중반의 미혼 여성이시다(워낙 동안이라 20대인 줄 알았다). 미술 선생님이 내 그림에 시범을 보여주시는 몇 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서로의 이러저러한 신상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내가 틈틈이 글을 쓰고 있으며 브런치에 글을 올린 지 3년 째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선생님은 자신도 예전에 몇 번 일러스트 그림을 그리고 짧은 글을 덧붙이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몇 번 올리다 꾸준히 계속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 그만둔 상태라고.
"그걸 왜 그만두셨어요! 전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면 독자에게 내 글을 전달할 때 얼마나 큰 장치가 될까, 늘 아쉬웠는데."
화실 선생님은 그러게요, 하시며 직업이 아닌 일을 꾸준히 하는 일이 어렵다며 나에게 어떻게 본업을 유지하며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전 뭔가 시작하면 일단 3년은 해 보려고 해요. 3년이라는 기한을 정해 놓으면 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조급함이 덜하거든요. 3년을 지속했는데도 그 분야에 여전히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면 미련 없이 손을 털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항상 그랬다. 삼세판, 그리고 3년.
무슨 일을 시작하려 할 때, 내 마음에 품는 지속 가능한 횟수와 기간이다. 시작의 첫머리에서 다짐한다. 3번은 시도해 보자. 3년만 지속해 보자. 같은 것을 3번 시도했는데도, 3년을 지속했는데도 비전이 보이지 않으면 깨끗하게 손을 털자,라고.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무언가를 시작하는 부담이 덜했다. 지속하는 기간 동안 덜 지쳤다.
중등 임용 시험 실패로 내 안의 동굴에 갇혔을 때도, 결혼 전 지인이 좋은 사람이라며 소개해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도 2번의 기회는 남겨두었다. 중년이 되어 시작한 등산이나 유화 그리기, 오카리나 연주 역시 3년이라는 기한을 두지 않았다면 시작하는 단계에 도드라지는 미숙함과 서투름이 싫어 금세 중단했을 것이다. 횟수와 기한이 정해져 있으니 한 번만 더해보자, 조금만 기운 내어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다.
언젠간 싹이 났으면, 하는 소망을 심는 거죠. by Pixabay
화실 선생님과 그 이야기를 나눈 한 주 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일러스트와 짧은 글 쓰기를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난 몇 편의 글과 그림을 그려 브런치에도 도전해 보라고 권했었는데, 브런치는 아직 용기가 안 난다며 우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고 했다. 그리고는 수줍어하며 일주일 동안 인스타에 올린 그림과 글을 보여주었다.
역시 재능을 가진 사람이 감성을 담아 그린 그림과 글은 충분히 마음에 와닿았다. 그녀는 내가 말한 '3년'이라는 말 때문에 다시 시작할 용기가 났다고 했다. 3년만 하자,라고 생각하니, 무언가를 마음먹고 몇 번 하다 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막막함을 조금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녀의 인스타 게시물을 보며 재능을 가진 그녀가 꾸준함을 겸비한다면 3년 이내에 어떤 성과를 얻을 것이라는 확실한 기대감이 들었다. 어쭙잖은 말보다 게시물에 반한 내 표정이 한껏 그 마음을 대신해 보여주었을 테다.
두 번째 상대는 오랜 친구였다. 오랜만에 연락을 해 온 친구가 자비로라도 책을 내어볼 예정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책을 내니 조급증 비슷한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
친구에게 써 놓은 글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제부터 쓸 예정이라길래, 일단은 글을 열심히, 진심을 다해 쓰고 출판사에 투고를 해보는 방향을 권했다. 자비 출판에 따른 장단점을 고려하니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한참 뒤, 이 친구가 대략 쓴 원고를 읽어봐 달라고 요청해 왔다.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대상이 프로 작가 자격 취득이라도 되는 양, 내가 이제 누군가의 글을 잘 판단해 줄 거라고 기대하는 듯했다(이럴 땐 정말 난감하다).
극구 사양하는 내게 반 강제로 보낸 친구의 글을 솔직히, 제대로 읽지 않았다. 일단 친구가 쓰는 글의 분야는 친구의 전문 분야였으므로 내 능력 밖이었고, 사실 독자의 니즈를 충족하는 전문 서적 분야는 문장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더라도 책을 내는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제대로 읽진 않았지만, 친구의 글엔 목차만 보아도 뚜렷한 콘텐츠를 담고 있었다. 뚜렷한 콘텐츠가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사만 만난다면 친구는 언젠가는 '출간'이라는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글 목차를 보니, 친구가 브런치 작가 신청에 단번에 합격하리라는 확실한 예감이 들어서, "써 놓은 글 몇 편과 목차로 브런치 작가 신청을 먼저 해" 보라고 권했다. 얼마 후, 친구는 브런치 작가 합격 소식을 알려왔고, 현재 열심히 글을 올리고 있다.
쓰다 보면 어느 시기에 어김없이 막막함이 찾아오겠지만, 친구에게도 '3년'의 마법을 주문처럼 불어넣어 본다.
최근에 글을 쓰라고 열심히 공을 들이고 있는 사람은 30년 지기 친구, K다.
여고 동창인 K는 오래전,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함께 글을 썼던 친구였다. 나보다 감수성이 100만 배는 풍부하고 어휘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진 K는 천상 글을 쓸 사람인데, 여고를 졸업한 이후로는 글쓰기와 멀어졌다. 나도 그녀처럼 글쓰기와 오래 떨어져 살다 이제 돌아와 쓰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녀 또한 돌아오리라 믿는다. 언젠가 울퉁불퉁 쌓인 그녀의 삶이 오랫동안 벼려온 문장들과 만날 때 어떤 광채가 날지 기대가득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맥락 없이 톡에 남긴다.
"넌 언젠가 쓸 애야. 그래야 네 삶이 더 나아져."
처음엔 귓등으로도 안 듣는 척하더니, 요즘 K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네 말을 주문처럼 자꾸 들으니 언젠가 뭐라도 쓰지 않을까... 싶다."
역시 공들인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다. K야, 넌 참 좋겠다. 글 한 편 공개하지 않았는데도 1열에 앉아 네 글을 기다리는 독자를 이렇게 이미 확보하고 있으니. :)
며칠 전에 동료 교사 한 분이 찾아와 넌지시 묻는다.
"요즘 또 책 쓰고 있어?"
작년에 이 학교로 옮기면서 난 어느 누구에게도 쓰는 사람 냄새를 풍기지 않았는데, 그녀는 어디서, 무슨 냄새를 맡고 온 것일까(킁킁, 냄새 나나). 난감할 땐 선제공격이 수다.
"쌤은 동화 쓰겠다더니, 어째 진행되고 계시나?"
동화를 써서 돈을 왕창 버는 게 꿈이라고 해맑게 얘기하던 그녀였다.
"음... 해 봤더니, 내가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어."
항상 비타민C를 과용한 상태의 치명적인 상큼함을 발산하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 엑센트가 약간 쳐졌다. '3년'의 마법을 걸 타이밍이었다.
"무슨 소리야! 과거처럼 재능 있는 사람만 글을 써야 한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평생 글 못 써. 시대가 바뀌어서 독자들의 니즈가 다양해지니 우리 같은 사람도 쓸 수 있는 시대가 왔잖아."
자기는 자기의 무기를 모른다. 그녀도 그랬다. 환경 문제에 누구보다 진심인 그녀가 10년 이상 공들여 꾸준히 실천해 온 환경 교육 분야가 글이 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녀에게 말했다. 여태까지 실천해 왔고 현재도 하고 있는 텃밭 가꾸기 교육이 그녀의 고유한 생각과 만나는 지점을 글로 30개 정도 써 보라고. 그렇게 한 권의 책이 탄생되는 거라고.
"그런 글이라면 내가 30개는 쓸 수 있지."
그녀의 엑센트가 다시 올라갔다. "그럼, 써야 하는 거야?" 묻는 그녀에게, "그럼, 써야지." 단호히 대꾸했다. "한 번 쓰고 싶다고 마음먹었는데 안 쓰면 언젠가는 꼭 후회하게 될 거"라는 내 말이 결정적이었는지, 그녀가 "그럼 써야겠네." 하며 돌아섰다.
언젠가 '20년 차 환경 지킴이 초등 교사의 텃밭 가꾸기'가 책이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작아지는 자신을 마주하면서도 난 왜 요즘 이렇게 '열혈 글쓰기 전도사'가 되었을까.
아마도 글로 마음을 쏟아내면 삶이 조금은 나아진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괴로운 글쓰기 과정 속에서도 결국엔 쓰는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자신을 드러내는 자신의 글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고 거울 같은 자신의 글과 대화를 나누며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어디 글 쓸만한 사람이 없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