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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Oct 28. 2023

아들의 합격이 가져다준 뜻밖의 고민

진정한 공정과 상식이란


"엄마! 나 합격했어!"

그리고는 수화기 너머 아들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어흐흑, 울음을 쏟았다.     


이틀간의 수채화와 드로잉 실기 시험까지 마친 후,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등교했지만 아들의 관심은 아마 하루 종일 합격자 발표가 예정되었던 시각, 오후 4시에 가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설마, 되겠지… 생각은 했어도 불합격될 학생 수 50여 명은 500명만큼 크게 다가온 게 사실이었다.    

 

수채화 실기를 마치고 나온 아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 '비트'가 뭐냐고, 어떻게든 수험생들이 안 접해 본 것으로 테스트 재료를 준비한 것 같더라는 말에 철렁했다. 비트 한 번 담아 본 적 없던 내 장바구니가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아들은 그럭저럭 그리고 나왔다고는 했지만 대상을 알고 그리는 것과 막연히 그리는 것의 차이가 없을 수 있겠는가, 싶어 소심해졌다. 이럴 때 엄마의 기도는 선하기만 할 수 없어진다. '제발 다른 아이들도 '비트'를 난생처음 보는 채소였게 하소서.'

그렇게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 PC에 합격자 발표 예정이었던 예고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그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3시 40분이 넘어도 안 뜨길래 정말 4시에 띄우나 보다, 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들이 먼저 소식을 알려온 것이었다.     


아들은 그동안 큰 몸에 꽁꽁 담아두었던 긴장과 불안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몽땅 뽑아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한참을 끅끅거렸다.

"엄마는 너 될 줄 알았는데, 넌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거야?"

몸집만 큰 녀석이 배곯은 아기같이 섧게 우는 데 장난기가 발동했다. 결과를 알고 나니 이렇게 농을 칠 수 있었지만, 아들이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녀석은 드로잉은 자신 있었는데 수채화는 아직 자신 있는 정도는 아니라서 좀 걱정했었다고 울먹울먹했다. 비트가 발목을 걸고넘어진 건 아니라서 어찌나 다행이던지.     


일찍부터 입시 미술의 틀 안에 아이를 밀어 넣기 싫었다. 그래서 아들의 입시 미술의 돌입 시기를 미루고 미뤘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계속 변할 수 있는 시기에 너무 일찍 아이의 진로를 결정하는 게 맞는가, 자신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고 친구들과 중학 과정을 보내다 보면 전에는 모르던 세상에 관심이 생기고 새 진로에 호기심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다 중 2 겨울 방학을 맞이하고 아들이 계속 미술로 예고 진학을 희망했기에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입시 미술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한 화실 원장님의 말에 낙담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엄마로서의 나를 자책했던 시간도 있었다. 투입 비용 대비 결과를 자신할 수 없어 그냥 일반고로 진학하자는 결론을 내린 시간도 있었다.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린 아들의 꿈이 아쉬워 비교적 들어가기 용이한 가까운 예고에 진학하기로 결정하고 입시 미술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공부를 해도, 미술을 해도, 음악을 해도, 운동을 해도, 학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현실에 한숨이 나왔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는 가능할지 몰라도 학원을 다니지 않고는 예체능 실기 대비가 어려워 예고 진학이 불가능한 현실이라니. 이런 비정상적인 교육 시스템에 한탄하면서도 자식을 보내야 하는 현실을 어찌하랴. 그렇게 시간과 돈을 쏟고도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는 어린 청춘들의 좌절을 생각하면 또 한숨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짧은 준비 기간에도 첫 목표를 한 단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낸 아들의 노력이 대견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스스로가 살기 위해 추운 데서 악착같이 밝아진 약재처럼 악조건을 이겨낸 녀석이 장해서 등을 팡팡 두드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열심히 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너무 자랑스럽다고 한껏 톤을 끌어올려 칭찬을 쏟아냈다. 엄마의 요란한 칭찬에 수화기 너머 아들이 비로소 허허 웃었다. 머쓱해하면서도 우유갑을 펼친 듯 활짝 웃고 있을 아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수채화 실기를 마치고 나온 날, 아들이 '비트' 말고도 전한 이야기 중 오래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있었다. 실기장에 물감을 준비해 오지 않은 학생이 있었다고 했다. 에이, 설마! 했는데 정말 한 학생이 개인 물감을 준비해 오지 않아서 스케치만 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채색 도구는 개인 준비 물품이었다. 아들 말에 따르면, 그 학생은 형평성에 어긋난다 하여 한참이 지나도록 채색을 못하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시험관이 물감을 가져다주어 색을 입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해 충분히 그림을 완성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아들은 전날 밤에 한 번, 시험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한 번 더 나와 준비물을 확인하고 갔었다. 하지만 보호자가 함께 점검하지 못할 형편의 아이였더라면, 개인 준비물을 구비할 수 없는 상황이나 형편이었더라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변수의 '만약'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그 일이 내 아이에게 있었던 일이라면…. 정말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물감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고 중학생인 수험생에게 그림을 완성할 기회마저 박탈하는 게 과연 형평에 맞는 일인가. 대입 수험생도 수성사인펜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고 수능 시험을 못 보게 하진 않잖은가 말이다. 수채화를 그리는 게 테스트라면 응당 준비물이 미비한 수험생을 위해 시험을 관장하는 측에서 만약의 경우에 미리 대비해 줘야 맞지 않았을까? 과도한 경쟁 사회에서 자비를 허용치 않는 단면인가 싶어 답답해졌다. 그날 그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을까. 합격자 발표날, 어떤 결과를 받았을까.     


내 아들의 합격 소식에 한없이 기쁜 날, 누군가는 상심이 깊은 날이었을 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비트'가 아들의 당락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듯, 준비물의 미비가 아직 어린 학생이 공들여 온 모든 시간을 저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모쪼록 그랬길 바란다. 공정과 상식의 잣대가 기회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어린싹을 싹둑 자르는 벼린 칼날은 아니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합격의 기쁨으로 가득한 아들의 톡 배경. 아들, 그동안 고생했어. 축하해! 그래도 사정이 다른 친구도 있다는 걸 생각하렴.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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