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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Oct 06. 2024

'흑백요리사' 시청 중단한 남편, 그리고 내놓은 음식들

승패도, 계급도, 전쟁도 없는 남편의 평화로운 요리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메인 포스터 ⓒ NETFLIX


요즘엔 남자들이 요리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많다. <냉장고를 부탁해>부터 <삼시 세끼>까지 남자들이 재료를 다듬고 요리하고 나눠 먹는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장면이 아니다. 요리는 기본적으로 먹을 상대를 고려하는 행위인데, 요리하는 남자들이 많아진다는 건 세상에 다정한 사람들이 불어나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진다.


'전쟁터에서 칼과 총을 들던 손에 요리기구가 들린다면 세상은 그만큼 평화로워지는 것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최근 넷플릭스 프로그램을 보고 남자들의 손에 그것이 들리면 요리도 전쟁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라는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인데, 현재 넷플릭스 방송/시리즈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남편을 매료시킨 흑백요리사


100인의 참가자들 중, 성비로 따졌을 때 남성 요리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승패', '경연', '계급', '전쟁'과 같은 말들이 상대를 배려하는 행위인 '요리'와 함께 연결되는 게 맞나? 싶었는데... 이런 요소들이 남성들의 아드레날린 수치를 한껏 끌어올린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이 프로그램 애청자인 남편 때문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1화부터 보던 남편은 방송 관계자인양 내게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재밌는지 열을 내어 홍보했다. 평소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이 요리할 때마다 자주 참고하던 유명 셰프들을 요리 경연 대회에 한 번에 모아 본다는 게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었겠는가.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화려한 볼거리와 요리에 쏟아붓는 셰프들의 뜨거운 열정, 경연 대회라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누군가는 떨어져야 하는 안타까움까지... <흑백요리사>는 남편의 마음을 꽤 오래 붙들었는데, 그런 남편이 이 프로그램에 흥미를 잃는 시점이 찾아왔다.


그것은, 살아남은 15인의 셰프들이 5인씩 3개 팀으로 나뉘어 직접 요리한 음식들로 레스토랑을 오픈해 운영하고 그 실적으로 승패를 결정하는 회차였다.


▲'흑백요리사' 속 한 장면 ⓒ 넷플릭스 관련사진 보기


모든 팀이 콘셉트를 정하고 요리 재료 구입까지 완료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도 가장 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한 사람을 방출하라는 지시사항이 각 팀에 내려졌던 것이다.

그렇게 세 팀에서 한 명씩 방출된 세 명의 셰프들로 네 번째 팀이 급작스럽게 결성되었다. 그 팀은 각자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를 메뉴로 택해 급하게 레스토랑을 열었지만, 매출이 제일 낮아 결국 팀 전원이 탈락하고 말았다.



시청 중단의 이유


남편이 방송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한 게 그 지점이었다. 탈락한 세 명의 셰프 중 2명은 다른 요리사들이 가진 화려함에 비하면 말 그대로 '흑수저' 이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만화방을 운영하다 요리 만화를 보고 떡볶이 요리를 시작한 것이 대박이 나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만찢남' 셰프와 고등학교 때 중국집 요리 배달을 하며 어깨너머로 중식 요리를 배웠다는 '철가방 요리사'가 탈락하자 남편은 굉장히 허탈해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셰프들도 그 자리까지 가는 데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할 험난한 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백수저'. 아무래도 남편 입장에서 현재 일과 명성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그들은 심리적으로 가까운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면,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그 자리에 설 때까지 얼마나 고군분투해 왔을지 어쩐지 알 것만 같아서' 남편은 방송을 보는 내내 만찢남 셰프와 철가방 셰프를 열심히 응원했다. 그러니 흑수저 중에서도 더 흑수저 같았던 두 셰프들이 결국 탈락하는 것을 보는 남편의 마음이 어찌 아무렇지 않았을까. 남편은 자신의 삶과 왠지 많이 닮아 있을 것 같은 그들의 탈락에 속이 많이 상했던지 그렇게 열렬하게 즐겨 보던 방송을 그 회차 이후 딱 끊어 버렸다.



그 후 남편이 자꾸 요리를 한다


그렇다고 남편이 그 상태로만 끝난 것은 아니다. <흑백요리사>를 보는 내내, 자신 안에 꿈틀대는 요리에 대한 영감에 자극을 받았는지 자꾸 요리를 했다.


▲남편의 요리: 두부김치 두루치기 ⓒ 정혜영


신김치와 돼지고기를 볶아 두부김치 두루치기를 만들고 소고기와 감자, 가지를 큼직하게 썰어 특이한 맛의 덮밥 요리를 만드는가 하면, 간장을 각종 야채, 과일로 끓여내어 연어장을 담그기도 했다(이건 딸의 최애 요리다). 얼마 전에 계피와 생강, 대추, 배를 끓여내 수정과를 만들어 곶감과 내어 놓았을 땐 남편의 요리 부심에 혀를 내둘렀다.


▲남편의 요리: 소고기 스테이크 카레 덮밥 ⓒ 정혜영
▲남편의 요리: 연어장 ⓒ 정혜영
▲남편의 요리: 곶감 수정과 ⓒ 정혜영


남편이 쉬는 날 한 점심 요리는, 바지락으로 가득 채운 육수에 생면을 넣어 끓여낸 바지락 칼국수였다.


승패도, 계급도, 전쟁도 없는 남편의 요리엔 요리 본래의 의미가 가득 담겼다. 어느덧 서늘해진 날씨에 따뜻한 칼국수가 먹고 싶어진 가족들을 위해 택한 요리였으니까.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 바지락의 시원함에 칼칼한 맛까지 더했으니, 어찌 맛이 없을 수 있을까.


남편의 요리엔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배려가 담겨 있다. 그것이 요리 본연의 목적이지 않을까.


▲남편의 요리, 바지락 칼국수 by 정혜영




* 덧붙임: 이 글은 10월 6일(일) 자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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