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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Oct 13. 2024

쓰는 마음, 쓰려는 마음... 모두를 응원합니다


"샘, 안녕하세요. 교사힐링연수에서 만난 J입니다."

얼마 전, 익숙하지 않은 이름으로 메시지가 왔다. J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하다 만난 장소에 "아!" 했다.


작년에 나와 동학년이었던 선생님이 함께 가자고 먼저 제안하셔서 신청했다가 덜컥 나만 되는 바람에 혼자 다녀왔던 1박 2일 교사힐링캠프.

아는 사람 없는 낯선 장소에서 혼자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일정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젊은 시절에야 1박 2일이 아니라 한 달 연수라도 찾아가곤 했지만,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열려있던 과거의 나는 어느새 익숙한 것들이 편안한 중년이 되어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가지 말까?' VS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인연을 맺을지 몰라' 두 생각이 팽팽히 맞섰다. 이럴 땐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땐 해 보는 쪽을 택하라'는 삶의 조언이 언제든 도움이 된다. 뺑뺑이로 돌려 선정된다지만, 5천 원 복권 한 장 제대로 맞는 법이 없는 내게 오랜만에 찾아온 운을 버리선 안 되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영감을 얻고 어떤 인연을 맺을지 모르니까.


J 선생님은 그 캠프에서 만나 한 방을 썼던 룸메이트였다. 누가 룸메이트가 될지는 미리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었다. 함께 가는 일행이 있을 땐 사전에 주최 측에 알려주면 한 방에 배치해 주는 것 같았는데 일행이 없었으므로 누구와 한 방을 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첫날 일정을 다 소화할 무렵, 숙소 배정에 대해 안내받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와 한 방을 쓰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20명씩 한 조가 되어 일정을 소화하던 사람들로  2인 1조 룸메이트가 정해졌다. 처음엔 키 크고 미인인 데다 하루의 일정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녀가 왠지 나와는 물과 기름 같이 느껴졌다. 내 본투비 친화력이 잘 작동하지 않은 덴 그런 유가 있었으리라. 난 대체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이 별로 없는 인데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행동을 삼가고 있었다.


그런 나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내가 감추고 있던 친화력의 족히 10배는 되어 보이는 사교성으로 나를 대했다. 선뜻 신상 정보를 공개했고(놀랍게도 그녀와 난 나이와 MBTI가 같았다) 밥 먹으러 가자, 산책하러 가자, 커피 한 잔 어떠냐... 를 제안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마치 30년 지기와 여행 온 친구처럼 나를 대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학창 시절 내 친구들을 대하는 내 모습을 보았지만 친해지는 속도는 사람마다 달라서 난 어눌하게 그녀에게 적응하며 순한 양처럼 처신하고 있었다. 나 이런 사람 아닌데, 왜 이러지? 내 행동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뭔가 어색하고 굼뜨기만 했다.


"억지로 가시는 건 아니시죠?"

그런 내 모습이 눈에 비쳤는지 산책을 나가자는 말에 따라나서는 나를 보며 그녀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예민한 센서를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아니에요!" 하며 서둘러 겉옷을 입고 따라나섰지만, 산행까지 포함된 빡빡한 첫날의 일정을 모두 마치자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맑은 샘물을 마신 사람은 새 활기를 얻는다. 자신을 먼저 투명하게 선뜻 내어 놓는 그녀 앞에서 쉬고만 싶었던 난 나도 모르게 내 삶을 맑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사람을 만날 때 하는 내 방식인데...?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과 일대일로 대할 때 드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내가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 때 상대는 이런 기분이구나, 하며.


카페에서 서로의 일상을 나눈 그날 밤, 싱글 침대 개가 나란히 놓인 잠자리에 누웠을 때 우리의 이야기는 절정에 달했다. 편안한 침실의 분위기와 고즈넉한 조명은 진실의 문을 열어주는 키 같았다. 역시 그녀가 먼저 그 키를 꽂아 돌려주었고 덩달아 문을 열고 들어선 나 역시 도무지 처음 만난 상대에게 할 것 같지 않은 얘기들을 쏟아내었다.     

         

함께 밥과 차와 소소한 일상을 나눈 사람은 친근해진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까지 나눴다면 친구가 된다. 아마도 그녀와 그날 밤에 나눈 이야기들이 아니었다면 일 년 만에 건넨 그녀의 메시지가 좀 생뚱맞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일 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다시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그녀이니 난 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순한 양 모드가 되려나.


그녀는 얼마 전에 어쩌다 북한산 원효봉에 올랐는데 너무 좋더라고 했다. 그때 매주 북한산을 다닌다는 내가 떠올랐고 다시 연락하게 되었다며.


"지금도 북한산 다니시나요?"

그녀의 메시지에 "그럼요."라고 답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장 그 주 주말에 함께 북한산 산행을 하며 알았다. 그녀도 그 메시지를 보낼 때 몇 번이나 망설였다는 것을. 괜히 물어봤다가 "저 이제 안 다녀요." 하는 답이 오면 어쩌나 싶어 주저했다고. 시원한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 안에 있는 또 다른 우물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 주 주말, 우린 함께 산행하고 점심을 먹었으며 그간의 서로의 삶을 나누었다.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성향상,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해 온 서로의 삶에 함께 기뻐하고 응원하면서.

내 기억엔 온통 그녀가 주도했고 난 따르기만 했던 것 같은데, "그날 선생님을 만난 게 내 삶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어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해주는 그녀가 몹시 고마워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었다.


내 북한산 루트를 함께 하려면 편도 2시간이나 걸려 와야 하는데도 그녀는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함께 산행하고 싶다고 했다. 그 먼 길 오고 가는 게 힘들지 않겠냐는 내 걱정을 그녀는 가볍게 날렸다. 그간 다른 지역 산에 다니느라 든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리를 굳건히 지키되, 사계절 다른 모양으로 살아가는 나무처럼 살고 싶었다. 누군가 나를 다시 찾았을 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다른 모습으로 반길 수 있도록.


내 공간에 기꺼이 들어와 함께 하려는 이를 만날 때, 공간은 이상 이전과 같은 아니다. 함께 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혼자 만든 장소의 의미와는 또 다른 의미를 더했다. 산행도, 필사도, 글쓰기도.


나이를 먹을수록 변화가 주는 막연한 두려움이 더 커진다. 인간관계는 더하다. 오죽하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을까.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이전에 맺었던 믿을 수 있는 인간관계만을 고수하는 걸 거다. 그런데 나이와는 상관없이 투명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나이를 떠나 친구가 되어도 좋다.


저를 포함해 글 쓰는 모든 이들을 응원합니다. (사진 출처: pixabay)


그녀와 나눌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앞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그녀를 보며, 재능이 있는 데다 통찰력이 깊은 사람이 나이에 굴하지 않고 꿈을 지속적으로 꿀 때,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내는지 며칠 사이 선명히 확인하지 않았는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와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한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 작가 소식에서. 글을 쓰는, 혹은 글을 쓰고자 하는 모든 이들마음이 매일 달뜨며.


말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삶과 존재로 가르치는 이를 만나면 사람은 변화하는 것이다. 그녀가 일 년 전, 잠들지 못하고 내어 놓던 아픔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살아냄으로써 치유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되어 한없이 기쁘다.

친구가 보내 준 소설가 이전의 시인인 한강 작가의 다음 시로 그녀처럼 글을 쓰려는 모든 사람들을 뜨겁게 응원하련다.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한강

거리 한가운데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거리, 골목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게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 2013.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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