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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여행의 의미

by 정혜영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가족의 모양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어릴 땐 아이들 중심으로 동그랗게 뭉쳐 살았다면, 아이들이 자라면서 각자의 생활 패턴이 생기며 사방형을 띠게 된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분주히 살아가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진한 선이 있기에 가족이란 때론 변형이 있더라도 어떤 모양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가는 것이리라.


아이들이 성장하니 명절을 제외하고는 함께 1박 이상의 여행을 떠나기가 어려워졌다. 두 아이가 모두 고등학생이 되고 둘째가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자, 간간히 하룻밤 정도 묵고 오는 콧바람조차 쐬기 힘들어졌다.

아침 일찍 나가 밤 10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 것이 보통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일상이다. 긴 대화는커녕 제대로 얼굴 보는 시간도 귀하니 아이들에게 집은 아침밥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하숙집이 된 지 오래. 그렇기에 연례행사처럼 우리가 한가족임을 입증하고 싶어 지는 걸까.


특히, 올해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쉼이 필요했다. 입시생 가정의 한 해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라는 객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큰아이 입시 결과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까닭에 당초 계획했던 동남아 여행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1월 초, 큰맘 먹고 떠난 2박 3일 파주 글램핑은 유쾌하지 못한 결말로 끝나고 말았다. 밤 11시부터 새벽 6시까지 주구장천 우리를 괴롭혔던 '대남방송'이라는 복병을 만났기 때문이다. 도저히 남은 1박을 유지할 수 없어서 남은 하루를 취소한 반쪽짜리 여행. 만회가 시급했다.


우리 가족의 소중한 시간을 하루빨리 좋은 기억으로 채우고 싶었다. 마침 형편상 올 설 연휴에는 시댁과 친정을 오가는 기나긴 행렬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하루가 임시 공휴일로 추가된 황금연휴라니, 기회였다!


보통 '여행'이라고 하면 캐리어를 빠방 하게 채우고 여권을 챙겨 비행기 탑승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인천 공항까지 내달리는 일련의 의식이 따라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게는 여행이 그렇게 부산스러울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쉼'이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남들은 모두 시골로 향하는 명절에 우리 가족은 명절 한때 반짝, 인구 공동화 현상에 빠지는 도심 한가운데로 떠났다. 북적북적한 도심 속 딴 세상인 한옥 스테이를 하게 된 것이다. 명절 연휴가 아니라면 서울 한복판에서 어찌 그런 고즈넉한 시간을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말이다.


첫날, 종묘 앞 쪽에 위치한 한옥 숙소에 짐을 푼 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인사동 쌈지길로 향했다. 친구나 지인과 몇 번 와본 곳이지만 가족과는 처음이었다. 아들이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매장 앞에서 관심을 보였다. 살을 뺀 뒤 부쩍 외모에 자신감이 붙은 아들은 자신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둘러보고 올 테니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권하니 아들이 쭈뼛쭈뼛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항상 엄마와의 시간을 갈급하는 딸이 그 순간을 낚아챘다. 아빠도 남겨두고 둘이서만 쇼핑하자는 딸과 쌈지길 구석구석을 누볐다.


숙소에서 출발하던 길에 흩뿌리기 시작하던 눈발이 제법 굵어지더니 금세 허공을 촘촘히 채웠다. 쌈지길 매장마다 반짝이는 공예품들에 반사되는 형형색색 빛깔로 한참 지난 크리스마스가 다시 소환된 듯 빛났다. 딸이 이런 순간을 나와 누리고 싶어 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지 모른다. 여전히 젖살이 덜 빠진 뽀송한 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캐리커처 매장으로 돌아가 보니 아들 옆에 나란히 앉은 남편의 모습까지 담긴 아빠와 아들 캐리커처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표정 짓는 게 세상 어색하다며 사진 찍기조차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웬일로 그 상당한 시간 동안 남에서 얼굴을 내어 주었을까. "아들과 추억 하나 만들고 싶었"다는 남편의 말에 남편의 호르몬 변화를 실감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묻던 배우에게 답해주고 싶다. 사랑은 변한다고. 이전과 달라져 낯설 때가 있지만 그래야 오래가는 거라고.


아무리 봐도 실물보다 못나게 그린 것 같은 아들 모습에 살짝 속이 상하려는데 아들은 괜찮단다. 늘 아빠 앞에선 행동거지가 조금 부자연스러워지는 아들이 캐리커처가 완성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쭉 아빠 곁에 붙어 있었다니... 왠지 심장 근처가 간질거린다. 아들도 그랬을까?


아빠와 아들이 함께 한 캐리커처. 아무리봐도 아들은 안 닮았네요. 실물이 더 나은데...^^


숙소로 돌아와서는 LA갈비로 저녁을 해 먹었다. 명절 기분은 내야 하지 않겠냐며 출발 전날 남편이 재어 놓은 것이었다. 네 식구가 한 테이블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을 함께 먹는 정다운 시간. '식구'라는 말이 비로소 본뜻을 찾는 다정다감한 순간. 남편이 간을 세게 했는지 갈비가 조금 짰다. 짠맛의 기억은 더 강렬한 추억으로 각인될 테지.


가족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훌쩍 큰 아이들의 체취를 좀 더 가까이에서 맡는 것. 부부간의 호르몬의 변화를 눈치채는 것. 어색함을 무릅쓰고 낯선 사랑의 표현이라도 시도하는 것. 추억을 오감으로 새기는 것.


그렇게 서로의 안팎을 살피고 서로에게 연결된 진한 선을 확인했다. 비로소 안도가 된다.



아빠와 딸. 창경궁 산책했어요.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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