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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넘기기 아까웠던 그 책

박노해 시인의 자전 수필, <눈물꽃 소년>을 읽고

by 정혜영


시인의 언어가 산문이 되면 평범한 문장도 절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인가. 예전에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읽으며 책장이 끝나가는 게 그렇게 아쉽더니 그런 책을 또 만났다.


박노해, <눈물꽃 소년>


시인이자 노동 운동가인 박노해 님의 어린 날의 이야기, <눈물꽃 소년> 말이다. 자전적 성장 이야기라니 신비한 탄생 설화처럼 지금의 그를 만든 범상치 않았던 그 시절 어린 소년과 그를 둘러싼 모든 우주의 영롱한 기운들에 관한 이야기쯤 되겠거니... 짐작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더 특별한 것은 저자의 입을 통해 가족과 이웃들이 살던 풍진 시대에도 절대 훼손되지 않던, 삶의 지혜를 담은 주옥같은 '입말'을 고스란히 전수받는다는 데 있다. 그것도 고향을 떠나면 누구나 입말 방식부터 고치느라 상당히 애를 먹는다는 내 고향 전라도 토속말로.


그랬다. 전라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고향을 떠나면 말의 방식부터 버렸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지만 본(本)을 버려야 안전하게 살 수 있음을 역사가 알려 주었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 타지로 왔을 때 내가 쓰는 일상어가 타지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면 불안했다. 귀에 들리는 대로 말의 속도와 톤(피치), 악센트를 연습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그 시절의 내가 섧기도, 딱하기도 하다.


이제는 특정 고향말을 떠올리고 싶어도 가물가물 잘 생각이 안 나서 일까. 책을 읽으며 고향에서 할머니가 엄마가 선생님이 이웃 친지가 동무들이 들려주는 말에 자꾸 뭉클해졌다. 모진 세상에 웅크리고 납작해진 나를 발견할 때 어깨 펴고 당당해지도록 힘을 주는 그들의 말들 덕분에 읽는 내내 가슴이 시리고 목이 메었다.


"잘했다, 잘혔어. 그려 그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인께. 잘 물어 물어 가면은 다아 잘 되니께." (p.12)


'사람이 지도'라는 할머니의 가르침에 그 시절, 초행길도 물어 물어 찾아갈 수 있도록 지도의 역할을 해 준 순하고 정 많은 사람들이 그립다.


"좋은 날은 말이제, 짧아서 좋은 것이여. 귀한 건 희귀하니께 귀한 것이고. 그랑께 감사함이 있고 겸손함이 있는 거제."(p. 14)


너무 멀어서 오가는 게 힘들어 주말에 못 온다던 딸이 갑작스레 다녀 갔다. 며칠 째 밤잠을 푹 못 자고 자꾸 깬다며 "너무 피곤해서 잠만 자고 가겠"다고 올라온 것이다. 홀로 자신을 돌보며 새 꿈을 향해 스스로를 단련하는 와신상담의 시간이 꽃길일리가. 집에 오자마자, 딸의 방 침대에 눕더니 "다르다, 달라." 한다. 하룻밤 단잠을 자고 일어나 "내 방이 남향이었어? 아침 햇살이 눈부셔 눈을 뜨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 한다.

내 옆에 항상 있을 것 같은 좋은 것들은 공기와 같아서 귀한 줄 모른다. 그랑께 감사하고 겸손히 대해야 쓴다.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지야. 새들도 묵어야 사니께 곡식은 좀 남겨두는 거란다. 갯벌에 꼬막도 저수지에 새뱅이도 씨 마를까 남겨두는 거제이. (중략) 아깝고 좋은 것일수록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평아, 사람이 말이다. 할 말 다하고 사는 거 아니란다. 억울함도 분함도 좀 남겨두는 거제. 잘한 일도 선한 일도 다 인정받길 바라믄 안 되제. 하늘이 하실 일도 남겨두는 것이제 하늘은 말없이 다 지켜보고 계시니께."(p. 16)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된다는 할머니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뭔가를 배우기 시작할 땐 그저 그것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일들이 욕심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다. 맑은 열정 대신 비교와 성취 욕구가 앞설 때 오히려 더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 다음 주 오카리나 지도자 자격 실기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더 그런 걸까. 연주가 깊어지려면 손가락이 아니라 마음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다독인다.


"산과 들과 바다와 꽃과 나무가 길러준 것들도 다 제 맛이 있지야. 알사탕이 아무리 달고 맛나다 해도 말이다, 그것은 독한 것이제. 유순하고 담박하고 부드러운 맛을 무감하게 가려 버리제. 다른 맛들과 나름의 단맛을 가리고 밀어내 부는 건 좋은 것이 아니제. 알사탕 같이 최고로 달고 맛난 것만 입에 달고 살면은 세상의 소소하고 귀한 것들이 다 멀어져 불고, 네 몸이 상하고 무디어져 분단다. 그리하믄 사는 맛과 얼이 흐려져 사람 베리게 되는 것이제."(p. 33)


세상에서 제일 귀한 내 자식 입에 단 것만 물려주고 싶은 게 어미, 아비의 마음이다. 이때의 '단 것'이란 알사탕처럼 다른 유순하고 담박한 맛들을 밀어내는 단 맛이 아닐 것이다. 세상의 소소하고 귀한 것들을 알아보며 맑은 얼을 지닌, 나름의 단맛. 그런 제대로 맛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것이다.


"하늘은 중헌 이에게 고생을 내려 단련시키시제. 비구름이건 눈보라건 다 햇님이 가는 길 아닌가. 굽히지 말고 걸어가소. 선령님들이 지켜줄 것이야."(p. 110)
"부귀와 영화를 꿈꾸고 성공과 지위를 좇은 들, 희망이 없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지. 어떤 시대 어떤 처지에서라도 사람이 살게 하는 건 희망인 게지."(p. 218)
어머니가 내게 좋은 자식이 되어 주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이 되고 나의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p. 225)


이 말씀들은 힘겨운 시간을 견디는 딸에게 전해주고 싶다. 네가 중헌 사람이라 하늘이 단련시키시는 중이라고. 예전에는 있는 지도 몰랐던 꿈이 생기고 이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는 딸의 말이 그렇게 눈물 나게 좋았다. 그거면 되는 거다. 그거면 사는 거다. 엄마는 우리 딸이 그저 네 자신이 되어 네 길을 밝게 찾아가길 바란다.


서로 나누고 기대는 것이 최고의 효율이고 믿음이라고, 좋을 때 안 쓰면 사람 베리니 도움 주는 일 미루지 말고 있을 때 나눠야 쓴다고, 다 덕분에, 덕분에 살아가는 거라는 고향 어르신의 말씀에 자주 고개를 주억이고 내내 가슴 뭉클하며 아깝게 책을 덮었다.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이라는 말에서 따왔다는 필명에 시인의 정체성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박기평'이라는 본명보다 필명이 더 널리 알려진 건, 저자가 꿈꾸는 '함께 사는 세상'온몸으로 증거 하며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값을 하며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어린 소년의 얼을 길러주신 기품 있는 말들이지 않았을까.


박노해, <걷는 독서> 중에서(캘리 by 정혜영, 배경 사진 출처: pixabay)



p.s. 책 표지 그림을 포함해 책 곳곳에 저자의 연필 그림을 만날 수 있어요. 이 단출한 그림들이 묘하게 마음을 당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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