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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경우의 수가 만든 산출값, 4월의 백운대

by 정혜영


동료 교사 J가 백운대에 오르자고 했다. 무엇이든 열심히 배우고 한 번 시작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는 새로운 일에도 거리낌이 없다. 그런 그녀가 주말마다 북한산에 오른다는 내게 북한산에 함께 가자고 하는 건 자연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백운대는 사정이 다르다. 봉이 많고 산세가 넓어 서울, 경기 고양에 두루 걸쳐 있는 북한산에서 단연 최고봉인 백운대에 오르는 건 4년째 북한산에 오르는 내게도 연 1~2회 오를 결심을 하게 하는 일이다.

북한산에 어쩌다 가는 분들이 북한산 하면 '백운대'라는 말을 듣고 다른 산처럼 북한산 꼭대기는 백운대인 줄만 알고 가는 사람이 더러 있기도 하고. 실제 남편이 30대 때 불어난 살을 빼겠다고 북한산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오르는 길을 따라 매주 한 곳만 오르내렸었단다. 그래도 매번 익숙해지지 않아 힘들었다는 곳, 그곳이 백운대였다.


그래서 J가 "백운대에 갑시다!" 했을 때, 내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나 보다. 그녀는 그런 내 반응을 자신과 단 둘이 가는 걸 편해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아직 우리 관계가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라고 짐작했다니, 사람 마음은 터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십상이다. 난 그녀가 백운대 산행의 난이도를 알고 있는지, 그녀의 체력이 그 정도가 되는지 알 수 없어서 확신의 반응을 못했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J쌤~ 백운대 예약 확정인가요?"

한 학교에 있는데도 직장에서의 시간은 둘만의 사적인 약속을 확인하는 것조차 미루게 하는 공적인 시간들. 3월에 임시로 잡았던 산행 날짜가 다가오자 J에게 톡을 보냈다. 마침 백운대에 가는 팀이 생기면 언제든 합류하고 싶다는 일행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동행해도 괜찮겠냐는 내 질문에 J는 내가 자신과 둘만의 산행을 정말 불편해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니, 한 번 생긴 오해의 골은 깊이에 끝이 없다.


내 마음을 솔직히 말하자면... 난 한 번 약속한 일은 웬만하면 변경하지 않는다. 안 될지도 모를 사정이 의심되면 아예 처음부터 참가 불참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 날짜를 잡았는데 이행되지 않는 일이 자꾸 생기는 상대와는 신뢰 관계가 생기지 않는다.


혼자 북한산에 꾸준히 다녔더니 호기심에, 일회성 도전 정신에, 간혹 새로운 운동의 시작점으로... 이유가 어쨌건 함께 산행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잡힌 모임이 여럿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혼자 산행하는 날보다 함께 산행하는 날이 많아졌다.

함께 산행하는 게 불편한 건 아니다. 혼산의 기쁨을 충분히 알기에 갈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약속 날짜 직전에 누군가 피치 못할 이유로 참여를 못하게 됐을 때, 다른 멤버들 역시 이런저런 사유로 불참 의사를 밝히며 끝내 함께 하는 산행이 무산되는 일이 반복되면 내 마음도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혼산을 할 때는 좋지 않은 날씨도, 약간의 불편한 내 몸 상태도 건드리지 못했던 내 마음에 다른 사람들의 직전 불참 소식엔 스크래치가 생긴다는 거다. 처음엔 '어차피 혼자도 했던 산행, 혼자 가도 좋아!' 했던 마음도 이런 식이 반복되면 상처를 입는다. 혼자라면 충분히 해냈을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들의 사정에 휘둘려 해내지 못하는 내가 언짢아진다. 해내지 못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으려는 얄팍한 내 마음을 마주할 때, 그게 몹시 불편하다.


그런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J의 제안에 흔쾌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살아오면서 그렇게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안의 나는 늘 같은 사람이라 다른 경우의 값에도 같은 결론을 내리니 참 어리석은 일이다. 다른 경우의 수인 세 사람이 함께 백운대에 오른 것은 입력이 다르니 산출이 다른 당연한 결괏값인 것을.


백운대 정상엔 진달래가 아직 남아 있어요.
백운대에서 바라본 인수봉. 사진을 끌어당겨 보면 벽에 오르는 사람들이 무당벌레처럼 붙어 있어요.


작년에는 백운대 낙석으로 인해 백운대 등산로가 통제되어 매년 1~2번의 백운대와의 조우를 못했던 해였다. J는 산행을 마치며 자신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해냈다고 후들거리던 장한 다리를 어루만졌지만, 정작 2년 만의 백운대가 반가웠던 쪽은 나다.

내가 백운대를 만났던 때는 늘 덥거나 추운 계절이었다. 봄의 백운대가 항상 궁금했지만 바쁜 신학기엔 엄두를 못 냈었는데, J 덕분에 봄의 백운대를 만끽할 수 있었다. 수박 겉핥기식의 대화로는 충분하지 못했던 J와의 관계가 산행 5시간 정도로 더 견고해졌음은 물론이다.


J, 내 얄팍한 마음이 당신의 큰 마음을 몰라서 미안해. 다음엔 꼭 둘이 갑시다!


J가 찍어준 사진에 캘리를 입혔어요. 홀로일 때 충만함이 함께일 때 충분함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캘리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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