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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중인 딸의 스트레스 해소법 2가지

by 정혜영


딸과의 금요 데이트.

요즘 내 불금 루틴이다. 집을 떠나 홀로 재수 공부를 하고 있는 딸의 안위를 살피고 잠시나마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딸이 원치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치 않던 대학에 입학해 반수 하겠다던 약속을 버리고 홀로 재수 공부에 들어간 딸이 처음엔 괘씸했다. 하지만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법. 도저히 스스로 용납이 안 된다는데 어쩌겠나. 그게 헛된 욕망이든, 객기 어린 욕심이든, 앞길 창창한 젊은이가 새 길을 모색하려 든다면 주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 응원밖에 더 있을까.


그러나 이때 부모의 한계선도 명확할 필요가 있다. 자식의 결정을 존중하나 부모로서 용인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은 분명하게 알려줘야 한다. 딸에게 제시한 내 한계선은, '집으로 들어오는 건 안 된다'였다.


익숙한 장소와 사람들 옆에선 사람들은 대게 행동의 패턴을 반복한다.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을 바꾸는 일이 똑같은 장소와 친근한 사람들 옆에서 어찌 쉽겠나. 부모로서 왜 걱정이 없었을까마는, 대게 더 좋은 연료는 결핍이지, 충족이 아니다. 늘 편안한 잠자리와 다 해 줄 것 같은 부모, 결이 맞는 친구들 옆에서는 똑같이 행동하고 그 결과는 제자리다.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면 현재 내 삶을 이루는 편안한 것들에게서 멀어져야 새 길이 보이는 법이다.



그래도 멀리 있을 땐 부모의 방문을 한사코 마다하더니 집에서 한 시간 조금 넘는 거리로 거처를 옮긴 뒤로 딸은 내 방문을 허락해 준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는 눈치다. 지난 금요일엔 딸이 딸의 숙소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에 함께 걸어가서 구경하자고 했다.


마트 구경은 딸의 스트레스 해소법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다른 한 가지는 코인 노래방에서 목 터져라 노래 부르기.

평소 딸은 전날 자기 전에 다음 날에 해야 할 공부 양을 플래너에 미리 계획해 둔다. 다음날 그 일과를 다 마치면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번화가 코인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온단다. 여섯 곡에 2천 원인데 자주 갔더니 지난번엔 사장님이 서비스를 넣어주시더란다.

가끔 혼자 마트 구경을 가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단다. 왜 마트 구경이 좋은지 모르겠다는 딸을 보며 내 고교 시절, 힘들고 답답한 시간에 숨통을 틔우기 위해 집 근처 재래시장 구경을 가곤 했던 내가 떠올랐다.

"딸, 엄마도 고등학생 때 답답하면 재래시장 구경 갔었어. 엄마 책, <어린이의 문장>에 이 일화 담겨 있는데 몰랐지?"

엄마의 책을 읽은 적이 없는 딸은 샐쭉 웃더니 나중에 읽어 보겠단다. 언제 읽을 줄 모르니 먼저 끌어놓아 둔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땐 몸을 움직인다. 느슨해진 피부에 찬바람이 닿고 회로가 꼬인 뇌에 맑은 공기를 쐬면 조금 더 투명해진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생각의 찌꺼기를 버리고 맑아졌을 때 좋은 생각이 들어찰 여지가 생긴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와 성적, 진로에 대한 스트레스가 나를 압도하려 할 때면 집 근처 시장에 가곤 했다. 시장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파닥파닥 생기가 넘쳤다. 매대에 진열된 이름도 모르는 등 푸른 생선들과 먹음직스러운 빛깔의 과일들, 푸릇한 채소들을 보면 왠지 기운이 솟았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실체 없이 떠다니는 걱정과 불안, 막막함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장에서는 한없이 옅어졌다. 매 순간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실체들 앞에 서면 왠지 좀 더 자유로워졌다.
_ <어린이의 문장>, p. 194~195, 정혜영 저


딸이 홀로 감당하고 있는 현실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방편들에서 그 시절의 모습이 겹친다. 유전자는 속일 수 없음에 놀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돌보는 딸이 대견했다. 완벽한 휴식이나 탈출이 어려울 때 마련한 쉼쉴 만한 틈, 그 작고 여유로운 틈이 언젠가 더 풍요롭고 단단하게 해 줄 씨앗이 되어 줄테니까.


금요일, 딸의 숙소에 당도하니 늘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던 딸이 모처럼 머리를 풀고 립스틱까지 살짝 발라 생기 있는 모습으로 나와 있었다.

"엄마랑 마트에 간다고 생각하니 설레더라."

마트에 가는 게 이토록 설렐 일인가. 딸의 말에 짙게 배어 나오는 외로움이 안쓰러웠다. 마주 잡은 딸의 손을 더 꼭 쥐고 걸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일상을 나누고 목적 없이 마트를 돌았다. 한창 예쁠 때인 딸에게 예쁜 옷이라도 사주고 싶었는데 결국 빈손으로 나왔다. 우리 집 딸방에 쓰임 없이 걸려만 있는 예쁜 니트들이 떠올랐다. 우리 딸, 내년엔 맘껏 입자.


내년엔 울 딸도 이렇게 입고 활보하자~♡


다행히도 딸은 스킨십이 약한 엄마인 나에 비해 애교쟁이다. 그래도 딸의 숙소 앞에서 헤어질 땐 안아주고 궁둥이도 토닥토닥해 주었다. 딸이 입꼬리를 활짝 벌리며 "흥흥"거렸다. 덩치도 큰 애가 그럴 땐 영락없는 여섯 살 아이 같다. "딸, 밥 잘 챙겨 먹어." 늘 똑같은 인사말을 건네고 뒤돌아 나오는 길, 곧 한차례 비가 퍼부을 듯 공기 중에 가득한 습기가 눅눅했다.


집에 돌아와 딸에게 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서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방법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외롭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 점에서 일과를 마치고 혼자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온다는 울 딸이 너무 대견하더라.
혼자 있는 시간을 하루, 이틀은 보낼 수 있지만 사실 몇 개월을 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그런 일을 우리 딸은 해내고 있잖아.
그런 시간은 절대로 의미가 없을 수 없지. 이렇게 해 본 적이 없는 네 친구들은 아마도 그런 00이라는 친구의 가치를 다시 매기고 있을 거야.
울 딸이 혼자서 이루는 빛의 시간을 엄마는 응원한다. 딸 사랑해~


딸이 어깨가 봉긋, 올라간 이모티콘을 답장으로 보냈다. "나 지금 울어." 하며.


딸과 나눈 톡 by 정혜영


최근 내 최애 작가님인 이승우 님의 소설, <캉탕>의 한 구절을 빌어 딸에게 다시 응원을 보낸다.


"되도록 멀리. 그래야 있었던 곳을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 되도록 낯설게. 그래야 낯익은 것들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되도록 깊이. 그래야 다른 나와 만날 수 있으니까."

_<캉탕> p.47, 이승우 저


딸, 네 익숙한 곳으로부터 먼, 낯설고 깊은 빛의 시간들을 마음 모아 응원한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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