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아들이 다니는 입시 미술학원 상담을 다녀오고야 알았다. 아들이 올해도 톰보 소묘전에 작품을 낸다는 걸. 작년에 금상과 상금 50만 원을 타고 얻은 자신감이 실력 쟁쟁한 예고 친구들 사이에서 한껏 위축되었던 아들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된 걸 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쏟은 열정과 들인 노력만으로 한 번에 되는 일은 쉽지 않고 그렇게 된다 해도 마냥 복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한 결과에 감사했었다.
그런데 또다시 참가하겠다니, 아들이 작년에 얻은 자신감에 더해 상금에 눈이 먼 게 틀림없었다. 작년에 참가했을 땐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을지언정, 결과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했으니 들인 시간과 노력이 허사가 되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욕심이 앞서면 과정의 순수성이 훼손되기 십상이다.
소묘의 특성상 연필과 지우개, 이 가장 기초적인 두 가지 재료로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길 작품을 그려내야 한다. 오로지 빛의 조절을 통한 명암으로 사물의 윤곽과 여백을 담아냄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을 꿈틀, 움직이게 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 욕심이 앞선다면 어딘가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갈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림이 무겁게 느껴지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한 대회에서 작년 수상자에게 또 큰 상을 주진 않을 텐데요..."
학원 원장 선생님께서 웃으시며 건넨 이 말씀이 비전문가인 내 생각에도 타당해 보였다. 미술 학도들의 노력을 응원하며 건강한 경쟁을 유도하는 이런 대회라면 좀 더 다양한 학생들에게 수상의 기회를 주려고 할 테니까. 그리고 그게 배우고 익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회의 올바른 취지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어미의 마음은 제삼자의 시선이 되지 않는다. 이 녀석이 상금에 어두워 욕심을 부리는구나,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의욕적으로 다시 도전한 일에 성과가 좋지 못해 의지마저 꺾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한데, 이럴 때 부모의 걱정이 도움이 되는가? 그럴 리가 없다. 머리 큰 자식이 내린 선택과 결정은 존중하고 지지하는 게 우선이다.
"아들, 올해도 톰보 소묘전 참가한다며? 작년 수상한 사람에게 또 큰 상 주긴 쉽지 않을 거야."
"어, 나도 알아."
"그래, 그럼 열심히 해봐!"
아들이 알고 있다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청소년들의 언어, '알고 있다'는 대부분 현실과 간극이 큰 말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을수록 창의적인 공간이 커지는 법이니까. 제 입으로 안다고 했으니 결과가 아쉽더라도 실망이 적기만을 바랐다.
바쁜 일상에 묻혀 그 뒤로 몇 달이 지난 8월, 아들이 무심히 툭 던지는 거다.
"엄마, 나 톰보 은상 받았어."
은상? 그거 금상 바로 아랫 상 아닌가! 그럼 이번에도 제법 큰 상을 받았다는 거잖아? 내가 또 요란하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대니, 은상부턴 상금 안 주고 20만 원 상당의 상품을 준다며 분해했다. 그랬지, 이 녀석 상금에 눈이 멀어한 거였지.
행운의 여신은 어쩜 이렇게 아들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신 걸까. 결과에 눈먼 마음을 꾸짖는 대신, 노력에 대한 보상은 준 게 아닌가. 아들에게 주어진 이 절묘한 상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내 마음이 바뀐 건, 아들에게 부탁해 톡으로 받은 아들 그림을 보고 나서였다.
아들의 연필그림에선 고단한 하루를 보낸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김치 반찬 하나와 찌개, 소주 한 잔으로 잠시나마 시름을 녹이고 있었다. 찌개는 모락모락 끓고 있었고 색깔이 없는데도 김치의 붉은빛이 느껴졌다. 허기짐의 순간에도 손을 닦고 내던진 누군가의 물티슈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조차 허락되지 않은 누군가의 물티슈는 뜯기지도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뜨는 거칠고 투박한 손 위에 이 그림의 모든 순간을 터치했을 아들의 손놀림이 겹쳐졌다.
아들의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림이 말하는 서사가 들리는 건 지나친 모정에 기인한 일이었겠지만, 그러면 어떤가. 아들의 그림을 보는 난 어미로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입장이었는데.
결과에 눈이 멀었다고 아들의 동기를 절하했던 내 마음은 틀렸다. 아들이 일확천금을 노리며 복권을 산 것도 아닌데 난 왜 아들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여겼을까. 무엇을 할지 선택, 결정하고 수많은 시간을 쏟아 결과물을 완성해 내는 건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의 땀이 들어가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내 목소리는 더 경망스러워졌다.
"아들! 작년에 금상 줘서 올해는 그 이상의 실력이어야 줬을 상이다. 차마 대상은 못 주니 은상 준 거네!"
엄마의 너스레가 싫지 않은지, "그건 아니고..." 하면서도 아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임지현 작가의 책,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편의점>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전에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누구나 한 번쯤은 잘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진짜 실력이 아니라서 두 번 세 번 반복했을 때 똑같이 잘하는 게 진짜 실력이래. 우린 아직 실력이 갖춰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다시 파이를 만들어 보자.
_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편의점>, 임지현
누구나 한 번쯤 잘한 기억이 있다. 그게 진짜 실력이 되려면 두 번, 세 번 다시 반복해 잘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설마? 했던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 이 삶의 가장 큰 부분을 만들어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우린 두 번, 세 번 같은 일을 반복하기 힘든 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서도 다시 반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출발선에 섰다는 뜻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우린 그런 자신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 대견하고 고맙구나. 엄마도 이번에 캘리그래피 공모전에 작품을 낼 때 많이 주저했거든. 이번 결과가 어떻든 두 번, 세 번, 꾸준히 연마할게. 우리의 10년 후를 함께 응원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