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드러난 것은 무엇일까. 부서지고 헝클어진 잔해들일까, 뒤집힘의 역설이 만들어낸 비옥한 토양일까?
2026년도 수능은 11월 13일에 끝났지만, 그로부터 10여 일 후로 예정되어 있던 어제의 논술 시험을 끝으로 딸아이의 거의 모든 입시 시험이 마무리되었다.
딸은 재수생이다. 딸이 시험을 치른 고사장은 좁은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 수능 당일 아침에도 겨우 아이만 내려주고는 부랴부랴 차를 이동시켜야 했을 만큼. 그래서인지 고사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리는 게 싫다며 딸은 내게 시험 종료 시간에 마중 나오지 말라고 했다.
수능 시험 전, 딸에게 수능날 원하는 점심 메뉴를 물어보니 죽을 싸달라고 했다. 긴장되면 소화가 잘 안 될 것 같다고. 그래도 중요한 시험을 보는 날, 죽이라니... 시험날엔 죽은커녕 미역국도 안 된다는 시대를 살아온 세대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위에 편한 다른 메뉴를 좀 챙겨주겠다고 해도 딸은 죽이 낫겠다고 고집했다. 소화가 잘 된다는 이유로 죽을 싸준다는 수험생 가정들이 의외로 많음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아이는 수능 아침도, 점심도 죽을 먹었다.
이번엔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봐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서인지 딸도, 나도 올해 일 년을 보내는 동안 자꾸 비장해지곤 했다. '괜찮다', '할 수 있다', '나를 믿자'와 같은 말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라고 딸에게 했던 말들은 어쩌면 나를 위한 주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힘겨운 한 해를 홀로 버틴 딸이 죽만 먹고 온종일 힘겨운 전투를 치렀는데 어찌 전장에서 홀로 돌아오게 한단 말인가.
108배를 하며 보낸 오전과 자꾸 흩어지는 마음을 쓸어 담으며 보낸 오후의 시간들은 어찌 그리 느리게만 가던지. 종잇장을 절반 포개듯 가뿐히 접어 수능 시험이 끝나는 시간으로 바로 날아가고 싶었다. 나이가 들면서 온통 빠르게만 흐르던 시간들이 탄성을 잃은 고무줄처럼 그렇게 늘어질 수도 있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어찌 이리 깃털처럼 가벼운 것일까.
마침내 긴 하루가 지나고 오후 4시가 넘자, 온라인 필사방에 수능 시험을 보는 자녀를 둔 회원 한 분이 아이를 마중가는 길이라며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을 올리셨다. 곱게 포장된 한 무더기의 꽃다발 사진을. 고생한 아이를 격려해 주고 싶다는, 아들만 키운 분의 섬세한 센스에 감탄했다. 좋은 건 빨리 배워야지. 나도 아이를 마중가는 길에 화원에 들러 꽃을 샀다. 20살 딸아이에게 잘 어울리는 청초해 보이는 꽃으로 골랐는데, 이름이 '거베라'라고 했다.
북적북적한 고사장 앞에서 꽃다발을 든 손에 한기가 들 즈음, 수험생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종료 대기 시간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어서 이미 내가 와 있음을 딸도 알고 있었다. 2층 고사장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던 딸아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꾹꾹 눌러 참던 눈물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한 번에 터진 듯했다. 1교시 국어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멘붕이 왔었다고, 망한 것 같으니 그냥 나가야 하나... 잠시 고민도 했었다고, 2교시 수학 문제를 풀면서도 1교시가 자꾸 발목을 잡았다며 펑펑 울었다.
"고생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쳤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거기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다."
아이를 달래며 했던 말들은 실패의 경험 앞에서 실망하고 좌절했던 젊은 시절, 내게 해주고 싶던 말들이었다.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던 경험들을 거름 삼아 좀 더 단단한 자신이 된다는 것을 네가 알 때가 올 것이다. 이미 넌 '20살 1년의 독립, 홀로 버틴 재수의 시간'이라는 네 친구들은 갖지 못한 너만의 무기, 스토리가 생겼지 않았느냐. 그 두렵고 암울했을 시간을 버텨온 내 딸아, 그걸로 충분하다. 네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너만의 강력한 서사가 생겼으니 그 막강한 힘이 너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것이다.
결국,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자신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실제 세상과 부딪히길 바란다. 스토리에 스토리를 더할 힘이 네게 있다.
아이의 마지막 시험이 될 논술 시험 전날,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 딸아이를 위한 2026년 캘리 달력을 만들어 주었다. 딸에게 해주고 싶은 문장들을 찾아 모으고 달별로 순서를 정했다. 각각의 달에 딸에게 건네주고 싶은 말들을 써 나가다 보니, 딸이 그려나갈 새해의 모습들이 글씨의 배경으로 펼쳐졌다.
달력을 본 딸이 두 번째 달부터 등을 돌리더니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끅끅거리며 마지막 달까지 읽는 딸의 등을 뒤에서 가만히 안아주었다. 감수성 풍부한 딸을 둔 엄마는 너른 품이 필요한데 그동안 엄마가 많이 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딸아,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2026년엔 꽃처럼 웃고 새처럼 노래하고 구름처럼 자유롭게 살아라. 남을 따라 살지 말고 네가 별이 되어라. 너무 이르거나 늦은 건 없다. 지치지 말고 가자. 엄마도 같이 갈게. 지지 않았던 그날들이 모여 지금의 네가 있단 걸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