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이미 길 위에 서 있다

큰아이의 입시를 마무리하며

by 정혜영


딸이 고군분투했던 재수 생활을 마감하고 대학생이 된다. 딸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2장, 엄빠가 권하는 대로 1장의 정시 원서를 내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이 되면 뒤(부모의 권유 학과)도 안 돌아보겠다고 했었다.

운명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아이가 그토록 고대했던 1지망으로부터는 끝내 추합 소식도 오지 않았다. 대신, 나와 남편이 권해서 썼던 교대는 최초합을 했는데 정작 아이는 그 기쁨을 한동안 누리지 못했다.


교사가 꿈이었던 나와는 달리 딸은 초등교사로서의 자신의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미래의 모습이 가지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답답하다고 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딸에게 꿈 없이 보낸 고등학교 3년과 꿈이 생긴 1년의 재수 생활 중 어느 편이 더 나았는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외롭고 힘겨웠을 1년을 버티게 해 준 건 그리는 꿈 때문이었을 테니까.


합격만 하면 원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합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심리적 방황을 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도 편치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조언해 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가, 괜히 아이를 푸시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가... 괜스레 챗지피티와 상담하는 시간만 늘어갔다. 아이 일은 왜 이렇게 쉬운 게 하나도 없는 걸까.



'아이는 이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챗지피티가 해 준 말 중, 말이 가장 위안이 되었다. 그래, 딸아이는 스스로 선택해야 열정을 발휘하는 아이지. 스스로 고민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할 테지.


자신 안에 있는 무수한 자신들과의 대화를 통해 좀 더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딸이 온전히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하며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엄마인 난 그저 뿌리 깊은 나무처럼 안정된 모습으로 중심만 잡고 있으면 된다.


딸은 재수하는 동안 매일 아침, 우리 가족 단톡방에 올라오는 엄마의 필사 문장을 보며 눈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연인과 이별한 사람에겐 세상 모든 사랑 노래가 다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듯, 딸은 내가 보낸 모든 문장들이 다 자기 상황과 연결되어 읽혔다고 했다. 방학 중엔 우리 가족 단톡방에 필요한 문장만 올리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것들이 나 대신 아이의 고민에 도움이 되길 바랐다.


브라우니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실수거든. 원래 케이크에는 베이킹파우더라는 게 들어가. 반죽을 부풀리기 위해서 넣는 건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면서 실수로 베이킹파우더를 깜빡한 거야. 베이킹파우더가 빠진 초코 케이크는 부풀지 않은 대신 초콜릿 맛이 훨씬 진하고 쫀득해서 너무 맛있었대. 그게 바로 지금 너희가 먹은 브라우니야.
_ <오늘도 행복을 구워냅니다>, 김나을


삶이 예상과 어긋날 때 우리는 당혹스럽고 안절부절못한다. 불안하여 심사가 요동친다. 기대에서 어긋났지만, 새롭고 독특한 맛을 내는 브라우니가 탄생한 것처럼 비켜간 삶의 길 저편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 진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은 내 안의 목소리가 되고, 그 목소리가 선택과 행동을 이끈다. 결국 누군가가 반복해서 건네는 말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그래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걷게 될 지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선택이 된다.
_ <말의 품격은 태도에서 나온다>, 지혜명


앞으로 딸이 만날 대학 동기들과 선, 후배들, 가르침을 주실 교수님들과의 만남을 통해 딸은 과거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이 자라고 새 세상을 그리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을 필사해 전달할 때, 딸이 앞으로 맺게 될 인연들이 딸이 살아갈 삶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길 바랐다.


"자, 제 계획을 들려주겠습니다!"


며칠 전, 저녁 식탁에서 딸이 이렇게 운을 떼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앞으로 해나갈 대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졸업 후 자신이 그리는 삶의 방향과 어떻게 연결 지을 지에 대해서도. 난 그때에야 비로소 안도했다. 딸이 자기 삶의 계획을 스스로 세웠으니, 이제 되었다.

아이는 언젠가 또다시 자신의 계획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을 때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아이가 삶에서 배워나갈 소중한 인생수업이다.


오늘 아침 필사 글귀 속엔 이런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들은 늘 한 발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_ <내 작은 정원 이야기> 중에서, 선호


그리던 꿈과 삶의 모습은 어쩌면 늘 한 발짝 앞에 있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손 내밀면 닿을 듯한 곳에 그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기에 우리는 또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이리라.


방황하며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 내 딸과 모든 청춘들이 내딛는 길이 꽃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마침내 각자의 꽃을 피워내리라 믿으며 온마음으로 응원하련다.



김광섭님의 시, '마음'(캘리그라피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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