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앞에 선명해지는 것들

by 정혜영


일상의 공기처럼 늘 함께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헤어져야 연인에 대한 내 사랑의 강도를 헤어릴 수 있고 잃어버린 후에야 후회하는 건강처럼, 대상의 가치는 그것과 이별했을 때에야 비로소 명확해진다.


한 해 지지고 볶다 보면 기어이 아이들과의 이별의 시간은 오기 마련인데 지금, 현재의 문제에 붙들려 너그럽지 못했던 나날들. 어른에게도 산타의 선물이 주어진다면, 한 해를 돌아보았을 때 부끄러웠던 순간들을 순삭 할 수 있는 지우개를 선물 받고 싶다. 이런 부족한 그릇의 사람에겐 더 품이 넓은 사람의 따뜻한 한마디가 위로가 된다.


종업식 날, 우리 반 준석이(가명)가 조심스럽게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곰돌이 스티커로 봉인한 예쁜 편지봉투였다. "준석아, 선생님이 이따 볼게." 하고 받아 들었지만 아이들을 모두 보낸 뒤에야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편지에는 정갈한 글씨로 써 내려간 준석이 어머님의 마음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준석이의 꿈에 대해 늘 응원해 주신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준석이가 좋아하는 하키 운동에 대해 도란도란(우리 반 글쓰기 노트)에 생각을 적을 때마다 항상 진심 어린 답글로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준석이 어머님이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의 온도가 올라갔다.


승리했을 때의 기쁨, 졌을 때의 실망감, 아쉬운 마음,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기분, 나쁜 감정까지도 아이의 잘못으로 보지 않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셔서 준석이의 가치관이 한층 단단해졌음을 느낍니다.


준석이는 학습이 조금 느린 아이다. 그러나 하키라는 운동을 대하는 준석이의 태도는 올림픽 선수 못지않다. 준석이의 하키에 대한 진심과 열정을 알기에 준석이가 하키 경기 전후의 마음을 쓴 글쓰기 공책에 내 마음도 함께 동했었다. 준석이의 글엔 준석이의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준석이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도 들썩였었다. 아이의 그 마음이 그저 기특하고 예뻐서 써 준 짧은 답글들을 어머님께서 다 알고 계셨다니...


신학기 첫 달, 학부모님을 처음 만나는 학부모총회 때 내가 우리 반 학부모님들께 당부드리는 것이 있다. 우리 반 글쓰기 일 년 프로젝트를 안내드리면서 아이들 글쓰기 공책은 웬만하면 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아이의 글쓰기를 볼 때 형식적인 부분(맞춤법, 띄어쓰기, 맞지 않는 문맥, 비문 등)은 너무 쉽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부모는 그걸 볼 때마다 몰려오는 수정 욕구를 누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최소한 첫 학기는 모른 체해달라고 간곡히 당부드리는데 준혁이 어머님은 그게 잘 안 되셨나 보다. 아무래도 준석이가 학기 초엔 더 읽고 쓰는 데 힘들어했을 터라 어쩔 수 없이 어머님께서 도와주셨을 거라 짐작은 하지만, 이렇게 모든 답글들을 마음에 두고 계신지는 몰랐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길러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든든함을 느낀 한 해였습니다.


준석이는 '인사상'을 받을 아이라는 말을 내가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인사성이 바른 아이였다. 볼 때마다 작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정도로 정성스럽게 넙죽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준석이를 보며 운동하는 아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준석이의 바른 몸과 마음가짐을 먼저 가르치신 분은 어머니였음에 틀림없다. 학교와 가정에서 같은 마음으로 함께 지도하는 아이가 어찌 바르게 자라지 않겠는가.




S 선생님이 2월에 퇴임을 하신다. 한국식 오카리나를 배운 뒤 교원앙상블, <강물처럼>의 단원이 되어 내 서투른 기량에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웠을 때 늘 온화한 표정과 말투로 따뜻하게 품어 주시던 분이시다.

세상에는 빠르게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느리고 서툰 이들에게 손 내밀어 함께 가려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세상을 고르게 나아가게 만드는 다정한 사람들, S 선생님은 그런 분이시다.


<강물처럼> 운영진에서 26년도 신년식 겸 S 선생님의 퇴임을 축하하는 조촐한 퇴임식을 준비했다. 우리의 연습실에 퇴임식 축하 플래카드를 걸고 오카리나 축주를 해드렸다. 누군가는 손편지를 써서 읽어 드리고 누군가는 S 선생님만을 위한 오카리나 독주를 해 드렸다.

난 S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가수 임영웅의 노래 '인생찬가'와 존경과 감사의 뜻을 담아 연주한 오카리나 연주곡, 조항조의 '고맙소'의 가사를 캘리그래피로 써드렸다.


S 선생님께 캘리그라피로 써드린 노래 가사(캘리 문구 출처: 조항조, <고맙소>, 임영웅, <인생찬가>, 캘리그라피 by 정혜영)


38년 교직 생활을 해오신 S 선생님. 다양한 아이들을 데리고 있다 보면 한 해 만 해도 별별 일들이 펼쳐지는데 38년 동안 S 선생님의 교직 역사는 얼마나 다사다난했을까. 한결같이 학교로 향하던 38년을 마감하고 학교가 아닌 곳에서 마주할 시간들을 S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고 계실까.


"인생 2막 더 멋지게 열어보겠습니다!"


S 선생님이 감사를 전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씩씩하게 외친 말씀이다. 늘 큰언니 같던 선생님의 찬란한 인생 2막의 순간, 영원할 수 있도록 저희도 함께 할게요. 선생님이 묵묵히 가셨던 그 길을 후배들도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한 해가 끝날 때, 나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의 관계를 돌아본다. 교육자로서 친절한 카리스마를 유지하느라 때론 인색하기도, 때론 야멸차기도 했다. 그런 못난 모습이 부끄러워도 후년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애씀의 바탕이 '사랑'인 까닭일 것이다. 내가 보낸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더운 가슴을 내어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이유이리라.





매거진의 이전글미래 교육의 현장, 교사들의 한국식 오카리나 정기연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