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에 가장 생각나는 곳은? 당연히 '따뜻한' 곳이다. 겨울철 동남아 국가에 여행객이 몰리는 이유일 것이다. 한겨울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따뜻한 햇살 아래 비타민 D를 듬뿍 충전할 수만 있다면 이 꿈쩍 않는 동장군도 조금은 견딜 만할 텐데, 현실이 어디 그리 녹록한가.
20년이 넘는 직장인이자, 중고생 자녀를 둔 엄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접어든 갱년기 배우자를 둔 나와 내 50대 친구들도 현실에 손과 발, 머리채까지 붙들려 일상을 수습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엄마가 행복해야 온 가족이 행복하고 개별 가정이 행복해야 국가도 행복한 거라 우기며 우린 틈만 나면 숨구멍을 찾는다.
마음이야 발리섬 해안가 리조트에 머물며 투명한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인다는 누사두아 해변에서 따뜻한 모래찜질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싶지만, 일과 돌봄에서 뻗어 나온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우리를 휘감고 딱딱한 돌덩이로 만들지언정 그런 호사까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20년 이상의 일과 돌봄의 짬밥을 장착한 우리가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우리에겐 대안이 있었으니,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였다. 그렇게 창원, 전주, 서울, 경기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내 여고 친구 4인방의 2박 3일 제주행은 전광석화처럼 결정되었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잠시 휘리릭 현실을 떠나는 이야기만큼 흥미진진한 일이 또 있을까? 어쩌면 외관상 도로시보단 서쪽 마녀들 쪽에 더 가까웠을진 모르지만 뭐, 어떤가. 다 생각하기 나름인걸.
그렇게 갑작스레 다녀온 제주 여행의 만족도는 최고였다. 그게 가능했던 겨울 제주 여행 3가지 팁을 공유하고자 한다.
첫째, 무리한 일정 없이 가볍게 떠난다. 50대는 그렇게 늙은 나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젊지도 않다. 특히, 일과 돌봄을 병행하는 삶에 폭삭 속은 여자들에겐 더욱. 우리의 제주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은 '쉼과 힐링'이었다. 2박 3일 동안 호텔 침대에만 드러누워 있다 온대도 나무라지 않기로 하고 떠났다. 욕심을 버릴 때 뜻밖에 더 많이 찾아오는 만족감은 행운이 아니다. 실제로 우린 숙소만 정했을 뿐 아무 일정도 정하지 않은 채 가볍게 떠났다.
둘째, 아이처럼 매 순간을 만끽한다. 중년이 되면 내가 뭘 맛있어하는지, 무엇을 할 때 기쁜지도 잊고 살아간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느라 책임감과 삶의 무게로 잔뜩 무거워진 어깨를 짊어진 채, 내 기호는 뒤로 밀리기 일쑤다. 눈치 보지 않고 학창 시절로 돌아가 작은 일에도 깔깔거릴 수 있다는 것,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이 최고로 재밌는 이유 아닌가.
곱게 갈아 병에 담아 간 원두를 호텔방에서 내려 마시며 침대 위에서 통창 너머 아침 바다를 음미하던 순간, 숙소 차림 그대로 외투만 걸친 채 걸어 나가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맛집에서 돼지고기 한 점에 알코올 한 잔 들이켜는 순간, 동백꽃 만발한 '삼달리 꽃밭에서' 감탄하던 순간, 발길이 이끄는 대로 삼달리 동백 정원 근처 바닷가에서 제주의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일렁이는 파도에 마음을 뺏긴 순간, 감귤 밭 귤 따기 체험에서 맘껏 귤을 따 먹으며 어떤 환경적 조건 속 나무의 귤이 더 맛있는지 체득했던 순간... 아이처럼 오감을 열어 세상을 마주하면 그토록 흔하던 것들의 빛깔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셋째, 우리들만의 합동 시그니처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누가 먼저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는진 모르겠다. 우리의 여행 자체가 어떤 목적성을 가진 게 아니었기에 누구 하나가 재밌는 걸 하면 따라 하며 웃느라 자지러졌으니까. 그렇게 '제자리에서 나란히 달리기'하는 포즈는 우리 사진의 시그니처가 됐다.
사회적 역할의 품위를 유지하느라 자의로, 타의로 몸의 움직임이 현격히 둔해진 50대들에게 사진 찍을 때 포즈 취하기는 쉽지 않은 과제다. 모처럼 시간과 경비를 들여 다녀온 여행 사진에 매번 똑같은 표정과 자세에 배경만 바뀌는 사진은 그 자체가 유물 같다.
폼을 만들다 손, 발의 협응력이 현저히 떨어진 자신의 몸에 웃펐다가 열심히 자세를 취하느라 뒤뚱거리는 친구들의 모습에 절로 박장대소가 터진다. 이래저래 웃음꽃 만발할 일을 놓치진 말자. 여행 후 역동적인 포즈의 사진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는 건 두고두고 꺼내 볼 보너스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2000년대 초반 TV 광고 문구였다. 일과 돌봄으로 잠시 쉼이 필요한 이들에겐 짧은 여행도 매 순간이 귀하다. 중년의 친구들과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고 있다면, 가볍고 느슨한 일정으로 좀 더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처럼 오감을 열어 만나는 뜻밖의 기쁨을 놓치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