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들어가기 전 수정 단계를 거쳐야 하는 초본이다. 업무 담당자가 각 반 아이들의 이름과 실린 작품을 꼼꼼히 살펴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보낸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는 이래서 1년에 한 번 편집자가 된다. 문집에 실을 아이들의 글을 모으고 담당계로 넘기면, 이처럼 초본을 만들어 다시 돌려보낸다.
전체 49개 학급에서 나온 작품이 실렸으니 어마어마한 양이다. 스크롤을 한참 내려 겨우 나의 반을 찾는다. 2학년 아이들의 글이다 보니 동시가 많고, 산문이래 봤자, 10줄 미만이라 수정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있을지도 모를 오탈자를 찾느라 몇 줄 안 되는 글도 한 자, 한 자, 집중해 가며 읽게 된다. 담임교사에게 최종 수정을 보라는 건,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반 아이들 작품의 최종 책임은 담임들이 져야 된다는 '책임 전가'이다. 담임이 넘긴 오탈자 수정 목록에 따라 그 반 아이들의 작품은 최종 완성이 되고 활자화되는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의 글 수정 목록을 넘기고 차분한 마음으로 교지의 앞장을 훑어보았다. 맨 앞부분은 당연히 '교장 인사말'이다. 평소에도 메신저를 통해 특별한 행사 전후 장문의 감사나 당부 메시지를 보내시는 분 답게 장-문의 정갈한 글이다. 이 인사말을 쓰시면서 교장 선생님은 혼자의 생각을 옮기신 것일까, 아니면 '교지용 인사말 참고 파일'이라도 갖고 계셔서 그것을 인용해 쓰신 걸까, 궁금해진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교장 선생님의 학교 문집 인사말을 쓴 적이 있다. 고등학생이 교지 교장 인사말을 썼다고? 자다가 봉창 뚫는 말(아, 옛날 표현~)이긴 한데, 실제 있었던 일이다.
지금이야, 생기부(생활기록부)에 쓸 창의적 체험활동 영역으로 '동아리 활동' 영역이 있고, 학생 주도적인 동아리를 조직, 운영할 수 있도록 독려하지만, 우리 때만 해도 사정은 매우 달랐다. 고작해야 문예부와 합창부 정도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허락된 동아리의 전부였다.
그것도 교사 주도적으로 운영되는 합창부는 일 년에 1~2차례 학교 이름으로 합창대회에 참가하여 상을 타 오니 학교의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학생 주도적인 문예부는 (공부는 안 하고) 걸핏하면 모여서 시나 책을 읽고 토론을 한대지, 일 년에 한 번 '시화전'을 연답 시고 학교 예산으로 장소를 마련해 달래지, 시화전 여는 장소엔 다른 남학교 문예 동아리 학생들이 득시글대지... 그렇게 '문예부'는 선생님들의 눈엣가시였던 모양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문예부 학생들을 학교 타이틀을 달고 공식적으로 남학생들이나 만나는 모임 정도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난 정말 글 쓰는 게 좋아서 들어간 동아리였는데, 선생님들의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음에 마음이 불편했다. 괜스레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했다.
그렇게 찬밥 신세이다가 일 년에 한 번, 학교에서 우리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때가 있었다. 학교 문집을 제작할 때였다. 글을 싣기는 실어야 하는데, 딱히 글이 많이 모이지 않을 때는 우리 문예부에서 글을 써서 올리기도 하고, 설문 조사 등으로 채우기도 했다. 그런 명목상의 문집은 왜 만드는지, 정말 실속 없는 보여주기 식 행사의 극치였다.
그래도 우리 문예부가 조금 더 기를 펼 수 있던 시기가 있었으니, 매년 실시되는 '호남예술제(지금도 실시하는지 몰라서 이 글을 쓰다 검색해 보니 올해로 65회를 맞이했다고 한다. 역사면, 규모면에서 국내 최대 예술경연제이다)'에 학교의 자랑인 합창부와 나란히 예술제에 참가할 때였다. 풍운의 꿈을 안고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양반 자제들처럼, 우리 문예 부원들이 예술제 <작문> 부문에 참여할 때인 것이다. 우리 중 누구라도 하나가 상을 거머쥐면 한동안은 문예부를 보는 선생님들의 시선에 조금은 온기가 돌았다.
그런데 작은 '사건'이 하나 생겼다. 내가 고 2 때 참가한 예술제에서 <산문> 부문에서 최고상(진짜 상 이름이 이랬다)을, <운문> 부문에서 문예 부원인 친구가 동상을 탔고, 최고상을 탄 내 글이 행사 주관이었던, 광주일보사 신문에 실리면서 학교 소개가 된 것이었다. 고 3 때 내가 다시 <금상>을 받아오자, 이번엔 교장 선생님께서 '친히' 교장실로 부르셨다. 문예부에서 일 년마다 우리 손으로 고생스럽게 치렀던 시화 전시회에는 선생님들의 그런 관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고 3 겨울, 국어 선생님께서 당황스러운 일거리를 주셨다. 나에게 학교 문집 첫 장에 들어갈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을 쓰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 고 3이 뭘 안다고 정년을 얼마 안 남기신 교장 선생님의 생각을 읽고 써내라는 말인가.
필시 교장 선생님께서 국어 선생님께 쓰라고 하신 것을 내게로 밀어내기 하셨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선생님이 쓰라면 쓰는 거였다.
출처: pixabay
그때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하고, 무슨 내용으로 채워야 하나. 글쓰기가 그렇게 재미없고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쓴다는 것은, '할 수 있다. 없다'의 능력을 떠난 문제였다. 쓸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써내야 했기에 교장 선생님이라면 어떤 말을 쓰실까, 빙의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이 쓰실 법한 사자성어, '온고지신(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앎)'이라는 말을 활용하여 백일장 대회에 참가하듯 글짓기를 했다.
글 속에는 쓴 사람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나는 인사말을 쓰며 어떻게 하면 글이 나를 감추고 교장 선생님의 모습으로 비추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두 페이지에 달하던 그 내용을 어떤 말로 다 채웠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난다면 참 많이 부끄러울 것 같다. 고 3이 60을 앞둔 교장 선생님 인양 쓴 글이라니, 얼마나 어색한 글이었겠느냔 말이다.
선생님이 시키신 일이니 어떻게든 써서 넘기면서 국어 선생님께서 알아서 고치시겠지, 했는데. 웬걸, 학교문집 완성본을 받아보니 내가 넘긴 그대로였다.
그때 난 모든 '진실'을 알았다.
국어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께서 문집을 얼마나 형식적으로 대하시는지. 글을 써 보겠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글 모임을 하던 우리 문예부를 그리 홀대했던 이유를. 그분들에게는 대외적으로 '학교를 홍보할 수 있는 누군가'만이 필요했다는 것을.
그때 문예부 선후배 중 아무도 '국문학'이나 '국어교육' 등 '국어'나 '문학' 관련 쪽으로 대학 진로를 택한 이가 없다는 사실은 이런 일과 전혀 무관한 일이었을까(나도 국어교육을 고민하다 다른 과로 최종 전향했다).
반 백에 가까워질 무렵에야 돌아온 고향 같은 이곳, 글이
작품이 된다는 '브런치'. '브런치'에서는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 없이, 그냥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오래오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나친 순수함 일런지.
내가 근무하는 학교 교장 선생님의 생각이 오롯이 담긴 교지글을 보니, 그때 내가 썼던 인사말이 생각나서 주저리주저리 길어졌다.
결혼 전에 아껴서 사모아 두었던 책들을 친정 엄마 댁에 방치했더니, 어느 날 다 처분하셔서 그 문집도 사라져 버렸다. 보아하니 내가 교장이 될 기미는 안 보이고, 교장 인사말을 대신 쓴 문집이라도 가보로 물려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허허, 너털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