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외과의사X Feb 08. 2021

익숙해지지 않는, 그럴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며

1.


어제 새벽 5시경 콜을 받았다.


"선생님 expire(사망) 환자 있습니다. 오셔서 colostomy(장루)와 라인들 제거해 주세요"


다른 콜이었으면 조금 더 미뤄두고 갔을텐데, 환자가 정리되길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눈을 반쯤 감고 병동으로 향했다. 처치실 한쪽 구석의 커튼을 열어젖히니 할머니 한 분이 누워계셨다. 존재하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시신은 마지막으로 긴 숨을 내쉬었던 그 입을 벌린 채 고요히 누워 있었다.


보호자가 가까이 있어 간호사에게 사망원인을 묻지는 못하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팔다리가 부었으니 심부전? 장루가 있는 걸 보니 대장암 수술? 피부가 누렇네 간 전이가 있었나? 등등 추론을 해보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그리 오래가진 못한다.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아무 생각 없이, 할머니 몸에 있는 치열했던 치료의 흔적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라인을 뽑고 피를 닦고 열려 있는 피부들을 최대한 예쁘게 꿰맸다. 깨끗이 잘 정리된 고인의 모습을 보면 가족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하는 마음으로.


정리가 끝나니 아침 먹을 시간이 되었다. 소독제로 손을 쓱쓱 닦은 후, 시신의 이곳저곳을 만진 그 손으로 토스트기에 구운 빵을 반으로 접어 입으로 넣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채우고 기숙사에 들어가 다시 침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잠이 들었다.


지난 1년간 내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에 익숙해졌다는 것. 처음 응급실에서 일할 때는 환자들이 아파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는데, 이제는 짐승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나뒹굴어도 그저 덤덤하게 "환자분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면 더 아파요. 진통제 드릴게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 안팎에서 사망한 환자들을 마주하거나 검안을 기다리고 있는 시신들을 볼 때도 마음에는 큰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이의, 나를 잠시 스쳐 지나간, 또 하나의 익숙한 죽음일 뿐이다. 이렇게 익숙해지는 것이 사실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이 있다. 첫째는 꽃피우지 못하고 가버린 아이들의 죽음, 두 번째는 충분히 살 수도 있었던 이들의 죽음이다.



2.


무더운 여름, 한 지방 병원 응급실에 교통사고 환자 두 명이 실려왔다. 음주운전이었고 운전자와 동승자 둘 다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간 사고였다. 먼저 운전자가 실려왔다. 그는 풀밭으로 떨어졌고 어깨와 허리에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하지만 다행히 검사상 눈에 보이는 골절은 없었고 얼굴과 팔다리에 약간의 찰과상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10분 뒤 동승자가 실려왔다. 그는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고 의식도 동공반사도 없었다. 입과 귀에서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미 CPR(심폐소생술)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머리 쪽이 크게 다쳤다


그가 스무 살인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입시경쟁에서 이제 막 벗어나 연애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할 나이인데, 곧 만개할 아름다운 꽃 같은 젊음인데, 네 인생은 이제 시작인데. 참담한 심정으로 20분 정도 CPR을 했고 아이 엄마가 응급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땀에 흠뻑 젖어 아들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는 내 옆에서, 아들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했다. "OO아 엄마 왔어 빨리 눈떠봐! 어서 이 녀석아 눈 좀 떠봐!" 어머니의 표정과 행동을 보니 아직 아들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셨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신 것 같았다. 가슴을 압박할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피가 내 팔에 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 커튼 밖으로 나가 계시라고 부탁드렸다. 그러자 엄마는 곧장 반대편 침대에 누워 있는 친구에게 다가가셨다.


"얘야 너는 괜찮니? 많이 아픈 곳은 없고?"

"아... 어깨가 너무 아파요..."

"그래도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다. 많이 놀랐지?"

"네.. OO이는 어때요?"

"지금 선생님들이 열심히 치료 중이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엄마 올 때까지 눈 좀 붙여"


그 대화를 들으며 마음이 무너졌다. 이렇게 갑자기 가면 어떡하니, 엄마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드려야지, 한 번이라도 돌아와서 너도 최선을 다했다는 걸 보여줘, 이렇게 기도하듯 되뇌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30분이 지나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커튼 사이로 그 혼란스러운 광경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켜보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병원에 오는 동안 20분 그리고 응급실에서 30분 CPR을 했지만 여전히 리듬이 돌아오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이제 더는 힘들 거 같다는 말에 엄마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조금만 더 해달라고 애원하셨다. 그래서 다시 20분간 더, 이젠 아이가 아니라 엄마를 위해 CPR을 하였다.


"사망 시각 새벽 2시 30분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마는 "선생님 우리 아이가 죽었다고요? 우리 아이가 죽었다고요? 정말 죽은 거예요?" 이 말을 반복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사망선고는 엄마가 붙잡았던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잔인하게 끊어버렸고 그 여인의 오열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며 숨 쉬는 것 밖에 없었다. 그 어떤 위로도 감히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이렇게 가버린 것도 비극이지만 이제 남겨진 부모는 어떻게 하나, 그 상처가 회복이 될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3.


평온했던 어느 날 오후, 40대 중년 남성이 응급실로 왔다. 속이 불편하여 로컬 병원에서 링거를 맞던 중 상태가 더 안 좋아져 응급실로 향했고, 오던 중에 구토를 하고 의식이 떨어지며 심정지가 왔다고 했다. 기왕력 없이 평소 건강하셨던 분이었고 CPR 시작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고 해서 돌아올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슴압박을 시작하면서 갈비뼈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119에서 어떻게 CPR을 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배운 대로 최선을 다했을 거라 믿어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CPR을 제대로 했다면 갈비뼈는 이미 부러져 있었어야 했다. 그 후 30분간 CPR을 하였지만 제세동을 할 리듬으로 한 번도 돌아오지 못한 채 그렇게 돌아가셨다.


환자를 정리하던 중 여동생이 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1시간 전에 자신과 통화하면서 그냥 장염이니까 링거 좀 맞으면 괜찮을 거라고 말했던 오빠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시신이 되어 누워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이게 말이 되냐며 날 붙잡고 오열하시는데 드릴 말씀이 없었다. 왜 돌아가셨는지는 검안을 해봐야 알겠지만 그 이유가 어찌 됐든 내겐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한번 지나간 생명 앞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이 무의미한 걸 알지만, CPR만 제대로 이루어졌어도 살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상황이 안타깝고 화도 났다.


이와 비슷한 감정을 들게 했었던 50대 아저씨도 생각난다. 그분은 목덜미와 오른쪽 어깨가 아파서 먼저 타 병원 응급실로 내원하셨다. 담당 의사는 환자가 이전에 목 디스크로 수술받은 적이 있어 그와 관련된 통증이라는 판단하였고, 환자 또한 추가 검사를 원하지 않아 디스크를 치료한 병원에 가기로 하고 퇴원했다. 그런데 집에 가자마자 구토를 하기 시작했고 기력이 떨어졌다. 아내는 남편을 바로 병원에 데려오지 않고 뜸 뜨는 사람을 불렀다. 그렇게 뜸을 뜨고 휴식을 취하며 반나절을 보냈지만 차도가 없어 다시 응급실로 내원한 것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식이 없었고 CT를 찍으니 뇌출혈로 인해 뇌가 한쪽으로 밀려 있어 급하게 수술을 했지만 결국 며칠 뒤 돌아가셨다. 처음 내원한 응급실에서 조금 더 신중히 환자를 보고 검사가 필요함을 설득했다면, 보호자가 뜸을 뜬다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이 환자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4.


위에서 나눈 환자들처럼 사고로 인해 아이들이 유명을 달리할 때, 그리고 '만약 ~면 살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겠지만,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일들이 마주할 때마다 떨쳐버리기 힘든 책임감과 패배감 때론 절망감마저 들곤 한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경험들을 하면서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났던 그 참사가 이전보다 더욱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세월호 아이들을 마치 응급실에서 만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 비극을 아래의 메타포로 받아들인다.


혈우병으로 피가 잘 멈추지 않는 고2 아이가 손가락을 베여 응급실로 왔다. 피가 많이 나지만 빨리 조치를 취하고 봉합을 하면 문제없이 집에 돌아갈 그런 상처였다. 당직 의사에게 전화를 했다. 당장 지혈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보호자와 간호사의 말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피는 멈추지 않고 아이는 점점 창백해져만 간다. 부모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그렇게 7시간이 흘러 아이의 혈압이 뚝뚝 떨어질 때쯤 당직 의사가 나타났다.


"아니 그렇게 피가 안 멈춥니까?"


그런 무책임한 말에도 아이 부모는 이제 의사가 왔으니 뭔가 달라지겠지 생각했다. 그 의사를 믿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치료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이미 아이는 의식을 잃었고 혈압은 계속해서 떨어졌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련의 조치들은 한마디로 ShowPR (이미 사망했다 판단되지만 가까이 있는 보호자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CPR을 하는 것) 이었다.


아이 부모는 그렇게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존재가 조금씩 피를 흘려가며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세상에 그렇게 잔인한 고문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피맺힌 절규를 하며 의사에게 묻는다. 7시간 동안 당신은 당직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었냐고, 왜 충분히 할 수 있는 처치들을 하지 못하게 막았냐고. 그 의사는 거기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내어놓지 않은 채 병원의 힘을 이용해 책임을 회피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밝혀지게 된다. 그 의사의 면허는 가짜였으며 지금까지 해왔던 그의 진료는 돈 많고 힘 있는 양아치 사무장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5.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천일이 조금 지났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이유는 그 어린 생명들이 충분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일어나서는 안 되었을 그 비극이 300명이 넘는 아이들과 그 가족에게 일어났다. 누군가의 죽음이 아직 피부로 와닿지 않았을 3년 전에도 세월호 사건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고 여러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는 지금은 그 고통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가 익숙해지지 못하는 누군가의 죽음처럼 안타깝고 그 부모의 오열하는 울음이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세월호는 천일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이 사회 곳곳을 위태하게 항해하고 있는 또 다른 세월호들이 있다. 출신과 학벌로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마저 재단해 버리는 사회.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입시 전쟁에서 하나 둘 쓰러져가는 아이들. 노동자들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들을 이윤 추구에 대한 욕심과 맞바꾸어 발생하는 산업재해들. 쓰다 버리는 물건처럼 여겨지는 비정규직 그리고 일용직 노동자들. 그들의 불안한 하루하루와 함께 흔들거리는 가정들.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일상적인 폭력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죽음 또는 죽음과도 같은 삶. 이렇게 또 다른 세월호의 전복으로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허무하게 가라앉고 있는지, 그 인생을 둘러싼 울음소리가 얼마나 애끓게 울려 퍼지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가슴 아픈 사건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끝내 익숙해지지 않을, 그럴 수 없는 비극이라면, 그 슬픔에 압도당하기 보다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해야 할 것 같다. 흐느끼는 이들의 옆에서 가만히 숨 쉬는 것을 넘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무언가라도 해야겠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부터. 그리고 그 너머로.






매거진의 이전글 <인턴X>와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