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외과의사X Nov 15. 2020

어느새 말턴이 되다

이제 인턴 한 달 남았다. 근데 지금 <극한직업: 안과인턴>인 관계로 말턴의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진짜 하루에 이만보는 기본이고 뒤꿈치는 다 터지고 밥 대신에 핀잔만 잘 챙겨 먹는다. 3월에 처음 인턴 시작할 때처럼 정신없고 노동강도는 <극한직업: 보령인턴> 후속작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명색이 말턴이라 던트들이 뭐라 뭐라 해도 내성이 생겨 평정심을 잃지 않고 내 페이스로 일 할 수가 있다. '어? 미안 몰랐어. 잘할게 앞으로' 이런 쿨함. '지금 이 정도 일해주는 게 어디냐'라고 스스로 칭찬도 하고.

주사기를 막 던져도 동맥으로 날아간다는 말턴. 3월에는 2시간이 넘게 걸렸을 일을 1시간 30분 정도 누워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30분 만에 끝내버리는 말턴. 그리고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그 이유를 꼼꼼하게 체크하는 말턴. 예전에는 몇 병동인지만 묻고 쏜살같이 뛰어가던 인턴들이 이제는 전화를 붙잡고 연인과 (티격태격) 통화하듯이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눈다.

"선생님 EKG 좀 찍어주세요"
"증상 있어요?"
"아니요 내일 수술 환자라서요"
"정규 때 안 하고 왜 늦은 지금..."
"환자분이 늦게 입원하셨거든요"
"수술 언젠데요?"
"내일 오후예요"
"그럼 오전에 하면 되잖아요"
"주치의 쌤이 오늘 찍어 놓으라고 하셨어요"
".....네....."  
(속마음1 : 진짜일까? 거짓말 같은데..)
(속마음2 : 주치의 이생퀴 진짜.. 지가 안 찍는다고..)

대화를 듣고 있으면 정말 치사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콜을 받으며 뛰어다닌 날 (사실 이런 날이 많지는 않지만) 이제는 안 부르지 않겠지 하며 침대에 뻗자마자 콜이 오면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하기는 쉽지 않다. 전에 동생이 병원 기숙사 와서 같이 잤는데 그날 밤에 1시간 간격으로 전화받고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이이이이인짜미취이이이겠눼에에에에~" 라며 꺼질듯한 함숨을 쉬고 걸어 나가는 날 보면서 앞으로 형이 주는 돈은 못쓰겠다고 했었다는.

아 그리고 말턴이 되면서 재밌는 것은 조금씩 변해가는 관등성명이랄까.

"비뇨기과 인턴 정규성입니다!"
"비뇨기과 인턴입니다"
"인턴입니다.."
"네..."
"왜요?"

대부분 2~3번 단계에 있지만 드물게 마지막 단계까지 가는 인턴들도 있다. 아니 생각해보니 마지막 단계는 전화를 안 받는 거다. 그래도 이런 대답 만으로는 그 인턴을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답은 그렇게 하나 츤데레 또는 찌발데레처럼 (계속 찌발찌발 하지만 속은 따뜻) 하며 맡겨진 일들을 결국 다 처리하는 인턴들도 있기 때문이다. 말턴들의 용맹한 모습은 내가 봐도 너무너무 멋있다.


부르튼 발에 바세린을 바르고 잠들려고 하던 찰나 다른 말턴들은 어찌 지내나 궁금하여 글을 남겨본다.


20170202

녹초가 된 말턴
매거진의 이전글 익숙해지지 않는, 그럴 수 없는 죽음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