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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 스컬리

수평과 수직

by 앤나우

궁금했다.


거대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서 그 앞에서 눈물을 쏟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실, 그림보다는 이번에도 역시 '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미술관에서 '직접'본 적이 없었기에 도판이나 책을 통해서 본 로스코의 그림에는 큰 감흥이 없었기에.


*추상 미술은 잘 모르지만 직접 가서 거대한 사이즈의 선을 보면 역시 '선'만 보이진 않을 것 같다.


온통 선으로 된 것뿐인 추상 속에서 사실 어떤 설명도, 배경지식도 제외하고 뭔가를 느낄 수 있을까.


미술관에 가끔 선으로 된 추상 작품이 나올 때마다 어떤 기분일지가 궁금해 더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삐뚤어진 부분까지 찾아내면서 작품 앞을 서성였지만 그때 역시 나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에 하나 더 의문을 붙이자면, 아무 설명 없이 직접 직관적으로 봐야 감동을 느끼는 것만이 예술일까?










Gateways to art 책을 마치며 대구 시립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일하시는 인경쌤의 강연을 들었다. 줌으로 듣는데도, 인경쌤의 작품 이야기는 언제나 재밌다.

인경님, 정약사님, 아템포님, 복규님과 함께 우리 다섯은 드디어 두꺼운 미술사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었다. 나는 중간에 합류해서 일 년이 조금 넘게 걸렸지만 다른 분들은 2년 동안 긴 책을 나눠서 월요일마다 줌으로 만나서 '같이'읽었다. 더 대단한 건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이미 이 책을 두 번째 읽는 모임이란 거다.
거기다가 나는 영어로 된 이런 두꺼운 책을 읽을 계획도 없었는데, 내 책도 아닌 희진쌤 책을 심선생님께 받아서 신기하게(?) 합류하게 됐고 미술뿐 아니라 '예술'을 보는 나의 시각이 더 넓어졌다. 이 책이 정말 정말 좋아서 이베이에서 중고로 한 권을 구입했다. 이 책, 한 권 만으로도 나는 할 말이 정말 많은 사람이다.
*예술의 관문이라는 거창한 제목과 달리 챕터별로 나눠진 이야기는 세세하고 신기하고 재밌게 구성됐다. 책을 빌려주시고 토스해 주신 선생님들께도 무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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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봤더니 희진쌤(책 주인)이 감쌌던 북커버가 전부 너덜너덜 찢어지는 사고가 (이런 경험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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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탈리아 여행가신 아템포님이 직접 찍어서 보내주신 사진 | 다시 새로 읽기 시작한 《아트, 어노테이티드》 (위에 접시는 내가 요리한 아침 밥^^)



>> 한글판도 나온 게 있는데 미술사 책을, 왜 꼭 영어로 읽나요? 언젠가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미술사 책은 한글 번역이 오역된 부분이 많고 직접 영어로 읽어보며 이야기하는 과정도 또 하나의 공부라는 대답을 들었다. 정말 그랬다. 단어를 찾아가며 공부하는 시간도, 누군가의 목소리로 듣는 직독직해 번역도 울림이 컸다. 한글로 주욱 읽었을 땐 발견할 수 없었던 또 다른 기쁨과 공부가 그 안엔 또 분명히 있었다. 미술사가 사실은 그림 하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 시대와(역사), 사람들, 사회, 결국 거기에 속한 개인의 이야기가 예술이 된다는 걸 처음으로 진지하게 깨닫게 해 준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여럿이서 '함께 읽기'를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참, 션 스컬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다시 돌아와서



션 스컬리의 작업하는 한 장면만 봐도 압도적이다. 커다란 몸을 움직여 알루미늄 판에 치덕치덕 아무렇지 않게 고민 없이 페인트 붓을 바른다. 무표정하다.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 희로애락이 담겨있지 않은 도구가 된 듯한 표정으로 보인다. 거침없이, 과감한 붓놀림이 시원시원하고 덧칠하는 소리가 생각보다 경쾌하고 가볍다.

사실 예술가의 작품도 대단하지만 이렇게 영상으로 창작이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자체가 즐겁다. 좋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왜 줄무늬를 소재로 쓰느냐.

>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 하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번에 그의 작품에도 71점이 모두 수평과 수직으로 된 추상화가 왔다고 한다. 작품에서 계속 아무것도 아닌 것을 다시 한번 조화롭게 융합하고 어우러지게 하는 작가의 손길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맞아,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 지금,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 하나 그을 용기'를 이야기해 준 권윤덕 작가님도 떠올랐다.




하버드 프레임 페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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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작품이 많았는데 이 작품은 좀 독특하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배웠던 뜨개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고 작품 역시 씨실-날실, 직조한 섬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엄마의 뜨개질 솜씨에서 받았던 유년시절의 따뜻함, 엄마에 대한 애정, 이 모든 것을 떠올리며 실제로 하버드 유학시절 중 탄생하게 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미국에선 미국의 것만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닌 가장 처음으로 돌아와 유년의 기억, 자기 작품의 원동력, 뿌리를 찾는 느낌이 들어서 더 와닿았다. 엉성해 보이지만 촘촘하고 탄탄한 옷도 결국 씨실과 날실의 교차로 시작하듯이 이제부터 하나씩 채워질 이야기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느낌도 들어서 뭔가를 더 들여다보고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내 주관적인 감상과 느낌이니까 정답은 없다.

*실제 작품의 크기는 어마어마합니다.




무제인가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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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두꺼운 벽돌 형태의 선은 성격이 더 강하고 센 사람을 상징한다고 한다. 반면 오른쪽으로 좀 더 다양하게 색이 분화되고 나눠지면서 층이 있는 선은 성격이 섬세하고 민감한 사람을 나타낸다. 이 둘을 극명하게 가르는 절개라인은 '관계'에서 보자면 숨구멍일 수도 있는데 그 경계를 거의 찾기 힘들다. 숨통이 트이지 않는 사이로 볼 수도 있다. 무겁고 두터운 왼쪽의 선이 오른쪽을 (잡아먹을듯한) 지배하려 드는 구도마저 느껴진다.


성격이 강하고 엄격한 엄마 | 민감하고 섬세한 아이


실제로 션 스컬리는 10대 때 사고도 많이 치고 히피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큰 아이도 출산하고 아빠가 된다. 가난하게 살았던 영국 빈민가에서 기억도 작품으로 많이 옮겼지만 19세 출산한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참척을 겪기도 한다.


이 작품은 사춘기를 겪는 자녀를 두거나, 자녀를 지배하려 드는 부모들에게 대화나 타협을 통해 아이들과 좀 더 여유 있는 관계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이라도 적당한 거리, 숨구멍과 숨통이 트여야 그 관계가 잘 이어지고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듯이, 누군가와의 강력한 밀착이 해답이 아닐 때가 굉장히 많다. 내 소유물로, 좀 더 강한 내 뜻대로 아이들을 몰아붙인 적은 없었는지 나를 돌아봤다. 더 다양한 색으로, 내가 모르는 부분이 더 무궁무진할 수도 있는 아이를 내가 좀 더 나이가 들고 '먼저'경험을 했다는 이유로(두꺼워진 선처럼) 그걸 강요하는 잘못을 저지른 적은 없을까. 나 역시 또 오른쪽에 있는 섬세한 아이는 아니었을까? 다양한 생각이 오갔던 것 같다. 아마도 점점 말을 안 듣는 첫째에게 알 수 없는 화가 한 번씩 불쑥불쑥 일어나려던 찰나, 이 그림을 봐서 더 인상 깊게 와닿았던 것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구부러진 삼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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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연결이 된듯한 모든 선들은 오히려 연결되지 않고 있다. 뚝뚝 끊어져 있는 선들을 볼 수 있다. 곡선 형태의 이런 선들은 리듬감 · 율동감은 느길 수 있지만, 결국 여기에서도 관계와 관계 사이가 조화롭게 이뤄졌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을 담고 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나에게는 강하게 다가왔다. 가정 안에서도 아이들이나 남편이 나만 바라보고 당연히 좋아할 거란 생각에 거기에만 안주했던 것은 아닌지, 나를 되돌아봤다. 세상을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건 분명 커다란 축복이다.



션 스컬리의 선은 선은 선인데 자로 잰 듯한 선은 하나도 없다. 손의 떨림이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서 삐뚤빼뚤, 덧칠한 흔적마저 분명하게 남는다. 하지만 작품의 목적이 조화로움과 융합, 어우러짐이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화합하려 하는 선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개인이 느끼고 가진 특별함을 통해(어쩌면 개별 된 선 하나씩을 통해) 무엇이든 바꿔 나갈 수도 있는 특별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어두운 빈민가나, 가난했던 런던 시절같이 자기 작품은 '잘못된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했는데 반대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은 하나같이 조화와 어울림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희망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찮지만 결국은 덧입혀지고 위에 또 그려지는 선처럼 관계를 통해 점점 커지고 또 다른 색을 갖고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번에 전시된 랜드라인 시리즈는 큰 사이의 작품을 여섯 작품 씩 따로 보게 전시를 배치했다고 한다. 아마도 커다란 방에서 압도적 크기의 그림을 바라보는 느낌은 또 전혀 다르겠지.



수평선이나 스카이 라인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진짜 있는 '선'이 아니다. 수평선과 지평선은 사실 우리가 가진 시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실제 있지 않지만 더 멀리 있어서 저게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는 '경계선'. 우리의 삶에서 경계를 가진 것이 과연 수평선과 지평선뿐일까. 우리가 선을 통해 그 안에 경계를 허물기 시작하면 수많은 걸 볼 수 있고 새로운 걸 찾을 수 있다.


작품에 대한 배경과 구상이 추상이 되는 과정과 작품들을 보니 역시 재밌다. 새롭게 와닿기도 하고 특히 영향을 받았다는 피에르 보나르, 사무엘 베케트, 션 스컬리가 '자기화'한 문장들을 보면 작품이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이 모든 설명과 배경을 제외하고 '작품'만으로도 다가오는 느낌이 진짜 예술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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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원적 그림을 벽에 붙여서 회화를 조각화한 작품 《흑백》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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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웨이즈' 멤버들 : 내가 제일 막내다 ^^




나는 결국 못 갔지만(T_T) 인경쌤이 계신 대구로 가서 바로 션 스컬리 작품을 직접 감상한 우리 미술사 수업 선생님들. 귀한 인연, 정말 좋은 분들이다. 아직 어린아이를 키운다고 숙제로 가장 적은 분량을 내주시기도 하고, 숙제를 까먹고 한 챕터를 못했을 때는 직접 도와주시면서 끝까지 할 수 있게 응원해 주시고(대신 척척 해주시기도 하고) 끌고 가주셨다. 작은 거에도 칭찬해 주시고 나의 좋은 점을 세워주셔서 늘 감사하고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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