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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을 쓸까

글을 계속 쓰게 하는 나의 원동력은?

by 앤나우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는 날에도 어딘가에 뭔가를 썼다. sns에 그냥 좀 짧게 써야지, 했던 내 글은 또다시 주저리주저리 긴 글이 되고 말았다.


짧게! 빡! 딱! 와닿게! 사진만으로 알 수 있게! 깔끔하게!


안다, 안다, 나도 잘 안다. 그런 글이 잘 먹히는(?) sns에서 조차 '왜 또 여기서 일기를 길게 쓰고 있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거긴 그런 공간이 아니야' 소리를 들으면서도 글을 썼다.

뭐, 어때. 내 공간이고 내 마음인데.


텅 빈 종이에 선 하나 그을 용기를 생각하면 (권윤덕 선생님 말씀) 뭐든 쓸 수 있을 것 같다. 메모장에도, 필사 노트에도, 그리고 핸드폰에도, 노트북에도.


나의 길고 긴 글을 받아주는 최상의 공간이 브런치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마음껏,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온통 나로 이루어진 글을 쏟아내도 허용되는 나만의 공간!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은 내용도 사진도 알차고 다 좋았지만 너무 길어서 오히려 가독성이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누군가의 지적이 글에 관한 거라면 언제든 귀를 열고 들을 마음이 있다. 애정을 가지고 내 글을 읽어줘서 기쁘다. 사실, 지적이나 충고를 받아도 기분이 조금도 나쁘지 않다. 그런 거에 흔들리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구나 생각한다. 가독성 없는 내 글을 재밌게 (*재밌진 않아도 그냥) 읽어주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냥 웃음이 난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있을까.








윤동주의 시 중에 마음에 와닿는 구절 하나가 생각난다.

이 시를 읽다가 엉엉 울어버린 적이 있는데 그 시는 바로

《쉽게 쓰여진 시》의 한 구절이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중간 · 마지막 부분 중에서)



속살거리는 밤비 소리를 들으며(혹은 보며) 육첩방은 남의 나라-,로 시작하는 이 시는 따뜻하고 포근하다. 아니다. 이런 기분으로 읽다 보면 금세 마음에 구름이 드리워지고 어두워진다. 속살거리는 밤비 소리도 뾰족하고 아프게 느껴진다. 가라앉는다.'부끄러워'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뭐가, 대체, 왜 부끄러운데?


그건 아마도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이미 알고 있어서 들어 본 적이 있어서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일제 강점기 시대, 그는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으며 매일 조금씩 죽어갔다.


나는 시를 읽기도 전에 시인의 프로필을 읽다가 눈물이 나서 국어 시간에 눈물을 꾹 억누른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윤동주'시인이었다. 후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윤동주 시인이 매일 조금씩 맞았던 알 수 없는 주사가 바로 '바닷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서러움, 부끄러움을 넘어 실험 대상으로 죽어간 이야기는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그런 모진 시련과 고난으로 늘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살았던 시인이 말하고 있다.

사실 그의 부끄러움 자체가 자학적이라든가, 자기 파괴적인 감정만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과 나라가 처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게 늘 괴로웠고 그런 와중에도 순수하고 결벽적인 성격답게 그만의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내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이 시인처럼, 시적화자처럼 절박하지 않아도 나는 이 구절이 꼭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


나 역시 나에게 내밀 수 있는 작은 손, 그게 바로 '내 글'이니까. 다른 사람을 향해선 환히 웃어주고 따뜻한 말도 건네주고 공감도 잘하지만 정작 내가 내 삶을 살면서 나를 제대로 거울처럼 마주하고 위로하고 용서하고 안아준 적이 있던가. 없었다. 아니, 없는 줄 알았던 중에도 딱 한 순간이 있었다. 그게 바로 '글 쓰는 나 자신과 마주한 시간'이었다. 아무도 안 읽어도 '하늘만은 읽어주지 않았던가!'가 아니라 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최초의 독자가 되고 활자로 찍힌, 혹은 손으로 쓰인 글자가 되어 박혀있는 나를 마주했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내가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던 이유는 나는 내 글의 첫 독자가 된 그 기쁨과 희열, 감격을 못 잊었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도 내 글에서 울컥하고, 왜 그랬지? 내가 이해 안 되기도 했고 이제 난 달라졌어, 하는 다짐과 같이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스쳐갔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내가 쓴 글에 내가 머물러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리지만, 바보 같지만, 이상하지만 앞으로 나가고 삶을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나란 사람이 뚝딱 이뤄지고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내가 나를 찬찬히 바라보고 마주하게 되는 순간, 그 시간이 바로 글을 쓰고 기록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순간이다.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 다시 '내 글'이라니, 조금 이상한 말 같지만 이게 사실이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감정, 경험해보지 못했을 일이다. 내 글이 나도 몰랐던 나를 찾아주고 점점 일으켜주고, 결국엔 나를 울리고 웃게 한다. 모자라고 부족한 나란 사람과 눈물 콧물이 범벅된 채, 잘해보자고 뭐,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악수하고 싶어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내가 쓴 글 속에 내가 보여서 좋다. 그건 또 나만 볼 수 있는 건지도, 하지만 누군가가 발견해 줬을 때 의미 있고 더 기쁜 건지도 모르겠다.



내 글을 읽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벅차고 뭉클한, 감사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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