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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그러니까, 알맹이가 누구 거냐고?

by 앤나우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이거다, 이거야!


신동엽? 개그맨 이름이랑 같네. 안녕하시렵니까? 돼지껍질 좀 드시렵니까? 큭큭

일단, 신동엽 기억해 두자. 근데 뭐, 이 사람 이름은 중요하지 않지.


서희는 삼촌 방에 있는 이 시를 보자마자 이번 백일장 시간의 아주 좋은 '알맹이'가 될 거란 걸 알았다. 모두가 외출한 시간, 외삼촌과 어울리지 않는 시집 한 권을 우연히 봤을 뿐인데 콩콩콩 작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거다! 내가 이 시간에 삼촌 방에 괜히 들어온 게 아니었어. 나대는 심장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시를 베꼈다. 괴발개발 글씨는 날아갔지만 아랑곳 않고 손끝에 기를 모았다. 움켜쥔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지만 임무 완수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만 알아보면 되지, 뭐. 이제 이건 내 거야! 초등학교 3학년 아이 중에 이 시를 읽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부분에선 이건 분명 야한 걸 말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고치지, 동시로 고치려면 아예 뺄까를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가라' 구절까지 완벽하게 베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갈 때까지 가라, 끝까지 가라, 이제 이 시는 환골탈태로 내 거야! 완전 범죄를 꿈꾸며 원래 모습 그대로 껍데기를 탈출한 뱀처럼 스르륵 (시집을 책상 위에 펼쳐진 페이지로 표시해 두고) 삼촌 방을 빠져나왔다.





어린이 브런치 이야기 '순수' 창작 글짓기 대회




서희가 쓴 시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이런,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서희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신동엽의 시를 베껴 쓸 때 이런 결과를 상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큰 상으로 사람들의 박수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얼굴도 처음 보는 교장, 교감 선생님께선 서희의 재능을 추켜세웠다.


생각보다 그렇게 유명한 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내가 진짜 그럴듯하게 시를 잘 쓴 걸까?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문학적 재능이 숨겨진 걸까. 기뻐하고 들떠야 하는데 오히려 식은땀이 났다.


틀은 그대로, 군데군데 등장하는 시어만 그럴듯하게 바꿨을 뿐인데 '금상'이라니, 거기에 남부교육 구청에서 주관하는 시상식에도 참여하고 상금까지 준단다. 서희의 몇 달 치 용돈을 가뿐히 넘기는 큰 액수다. 돈을 받으면 기쁘고 팔랑팔랑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마음이 무겁다. 브런치 백일장에 참여했을 때 휘날리던 팜플랫에 쓰여있던 글자, '순수 창작'이라는 네 글자가 마음에 뾰족하게 박힌 것 같다. 껍데기는 가라인데 서희는 어디서 큰 소라게 껍데기라도 찾아서 숨어버리고만 싶다.








그때였다. 언제나 '허허'웃으시기만 하던 담임 선생님께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이던, 암탉을 잡으려다 놓친 귀여운 꼬마처럼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서희에게 이 책을 내밀었다.


"허허, 이 녀석. 참 …. 네가 쓴 시, 선생님도 어제서야 읽어봤다. 서희야, 선생님한테 무슨 할 말 없니?"


"네? …."


"자, 이 책의 세 번째 이야기 『집게네 네 형제』를 읽고 내일까지 감상을 꼭 써오너라. 나는 『개구리네 한솥밥 』이 제일 재밌긴 하지만. 여기에서 뭘 느꼈는지, 감상은 한 줄이어도 좋다.

단, 조건이 있어. 꼭 네 생각을 써오도록!"



아으, 이건 또 뭐야. 서희는 표지에 등장하는 너구리 같은 표정으로 표지를 들여다봤다. 상을 받았을 때 보다 더 부끄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이건 상일까 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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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머거리 너구리와 백석 동화나라 | 백석 | 웅진주니어





집게 네 형제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하지만 위에 세 형제는 집게로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굳은 껍질, 고운 껍질, 뽐내며 사는 걸 부러워서 자기가 살 '껍데기'를 찾아 나선다. 맏형은 강달소라 꼴, 둘째는 고운 배꼽조개껍질을, 셋째 동생은 곱고 굳은 우렁이 껍데기를 쓰고 우렁이 꼴, 우렁이 짓을 한다.




그러나 막내 동생은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하고
아무 짓도 아니하고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했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강달소라인 줄 알고, 배꼽조개인 줄 알고 우렁이인 줄 알고 제각기 다 우두둑 오지끈 오싹 바싹 쪼박나고 잡아 먹히고 죽고 말았단 이야기. 하지만 자기 본연의 모습 그대로, 껍데기 속에 몸을 숨기지 않은 막둥이만 살았다. 뭐, 예상한 결말이다. 여기까진 교훈도 잘 알겠다.


하지만 흉내 내지 않아서 살아남았다는 교훈보다, 평안하게 잘 살았다는 행복한 결말보다 서희의 눈에 들어온 구절은 정작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 아무것도 안 쓰고 아무 꼴도 아니하고 아무 짓도 아니한 막내만이 오뎅이가 떠와도, 낚시꾼이 기웃해도 황새가 찾아와도 "겁 안 났네",라는 구절이었다.


겁 안 났네.


서희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겁 안 났네, 구절을 중얼거리며 연필을 잡았다. 신나서 삼촌 방의 시를 베껴 쓸 때 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연필의 무게. 그래도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첫 문장을 썼다.


저는 알맹이를 잃어버렸습니다. 제 안에 있는 알맹이가 뭔지 몰라서 첫째, 둘째, 셋째처럼 껍데기를 써야 알맹이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좀 그럴듯한 뭔가가 될 줄 알았어요. 그냥 막내처럼 있는 그대로, 내 모습 그대로를 썼더라면 겁은 안 났을 텐데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저는 남의 껍질에 숨어서 떨어야 하는 소라게가 된 것 같았어요.

'표절'이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베껴보니 알겠더라고요. 남의 껍질을 쓰고 살면 잠깐은 빛나는 것 같은데 무겁기만 할 뿐 제 안에 있는 '알맹이'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껍질이 오히려 알맹이를 쪽쪽 빼먹고 있었어요.


알맹이가 온전히 내 것이라야만 껍데기도 벗을 수가 있다. 있는 그대로 부끄러워도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베끼는 것보다 당당하다! 글씨로 다 담지 못했지만 서희의 마음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진짜 껍데기여 가라!"라고 크게 외치고 싶은 심경이 들었다.








신동엽 시인 | 백석 시인의 시를 통해 서희언니의 유년 시절 경험을 동화로 각색하다.


Nnow | 앤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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