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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날리기

연은 바람에만 날지 않는다

by 앤나우

인생은 연날리기처럼 …

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얼레를 가만히만 잡고 있어도 마음이 편안했다. 살면서 멍 때릴 수 있는 순간이 별로 없는데 (심지어 나는 카메라 앞에서 친구들이 '멍 때리는 표정으로, 무심히'이런 말을 해도 뭔가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고야 만다) 연날리기를 하면서는 무심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편안했다.

고요했다. 잠잠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하나가 이렇게 멀리, 높이도 커다란 물체를 날아가게 할 수 있구나, 그런데 그게 영영 날아가지 않고 내 손에 있구나, 늘 바쁘게 뭔가 분주하게 지내는 나로서는 '연날리기'야말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억지로 움직이지 않아도 바람을 그대로 타서 실을 풀어주거나 감아주거나, 선택지도 짧고 간단하고 명료했다.









오랜만에 평화누리 공원에 갔다. 트렁크에서 커다란 연 두 개를 꺼냈다. 형아의 독수리 연은 만들어진 것도 천과 철사로 되어있고 조립부터 까다롭다. 얼레도 낚싯줄로 되어있는 튼튼함을 자랑한다. 당연히 그걸 탐낼 줄 알았건만 선율이는(둘째) 자기 연을 먼저 척척 챙긴다. 복잡하게 조립할 필요도 없는 가벼운 방패연.


얼레도 평범한 플라스틱과 실이다.


자, 이제 날려볼까?



이런이런,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다.



살짝 바람이라도 있어야 연이 날것 아닌가? 실망스럽지만 또 바람이 오기까지 기다리려고 주섬 주섬 연을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선율이는 잠깐 내 손을 잡더니




엄마 기다려 봐 봐!




하더니, 살짝 높은 곳에서 나에게 연을 들라고 한 뒤 저 아래로 내려간다.




이제 손을 놓으라는 신호를 준 뒤, 연이 뜬 걸 보면서 혼자 실을 마구 푼다.

나는 이제껏 연이 하늘에 높이높이 떠서 연인 줄 알았는데 공중에서 뜨기만 해도 연이구나.

아주 낮게 한참을 나는 연을 보다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 눈에서 아주 멀어져서 점이 될 만큼 높이 높이 떠있는 연을 바라보는 게 좋았는데 아이는 내 키보다 저 나무보다 살짝 높기만 해도 떠있는 연에 그저 싱글벙글 즐거워한다. 그리고 연이 떨어지면 실망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바람을 팔랑팔랑 일으켜서 마구 달리는 게 아닌가!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연날리기에 흥미로워서 아이를 한참을 쳐다봤다.



누구랑 비교할 필요도 없이, 비교할 것도 없이 그저 지금을 즐기고 즐거워하는 삶, 연날리기에서 배운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졌다. 바람이 없어도 냅다 뛰면 연은 펄렁펄렁 팔랑팔랑 바람을 만든다. 이리저리 움직여서 살짝 뜬 연은 높이 날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오래 떠 있는 연을 관찰할 수 있다.


아주 높고 강해 보이는 연을 가졌어도 연이 곧장 날지 않자, 실망한 첫째 아이는 재미가 없는지 곧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린다. 아빠가 높이 띄워주면 그제야 얼레를 잡겠다고 부탁한다. 우리 옆엔 연날리기 고수 포스를 풍기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바람 상태를 체크하고 커다란 연을 착착 조립하고 분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계속 눈길이 갔다. 바람의 때를 기다렸다가, 고수 아저씨가 준비하고 날리는 비슷한 때, 연을 좀 날려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아저씨의 연은 날리자마자 높은 가로등 같은 데 걸려서 내리는 데 한참의 에너지를 써야 했다. 푸하핫


저마다의 삶의 방식도 이렇지 않을까. 좀 잘하는 사람의 때를 기다리고 흉내 낼 필요도 없는 거다. 누가 고수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고수를 정하는 기준 같은 게 있을 리가! 어떤 대단한 장비와 조건을 가졌어도 제대로 즐기고 재밌게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가만히 있는 평온한 상태, 그걸 멍 때리고 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나는 언제나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가정의 달 5월엔 아침저녁으로 이어지는 약속과 스케줄, 아이들과 나들이, 병원 방문에 집에 오면 눕자마자 바로 잠들기 일쑤였다. 대체 글을 언제 쓰는데? 이렇게 내 살림도, 육아도 버겁게 하면서 지금 하는 스터디를 이어서 하는 게 맞을까 몇 번이나 묻고 고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찾아오고 내가 맡은 분량을 더 잘 해내고 싶어서 부족하지만 아등바등 참여하고 들어가고 내가 할 일을 했다. 맡은 일을 하고 숙제도 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데 하루살이처럼 애썼다. 그렇게 쌓이는 하루하루는 끝났을 때 당장의 뭔가를 가져다 준건 아니지만 분명 그다음 순간 다른 문이 열리게 한 것도 사실이다.


즐기는 자의 편안한 자의 여유는 없었어도 몰두하고 순간순간을 누릴 수 있는 상황들에 감사하단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은 나와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사고한다. 그럼에도 내가 제일 대놓고 관찰하고 많은 걸 느끼게 하고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다. 둘 다 다른 기질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방식도 다르지만 비교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걸 당당히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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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히 떠있는 연만큼 행복도 다양하다 | 혼자 긴 나뭇가지로 봉술(?)을 연마 중인 ㅋㅋㅋ 둘째





책 모임을 하며, 연날리기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심선생님께선 놀라시며


나경씨는 액티브한 사람이라, 직접 날리고 뛰어다니는 연날리기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멍하니 줄을 잡는 순간을 좋아했다니 의외네요.


라고 말씀하셨다. 아, 나는 너무도 분주하게만 달리면서 살았기에 연 날리는 시간만큼은 조금 쉬어가고 멈춰가고 싶었던 걸까. 가끔씩 멈춰서 내가 가는 길을, 내가 지나온 길을 한 번씩 둘러보고 나만의 '글 쓰는 시간'을 꼭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연 줄이 끊어질까 봐 연 날리기를 무서워서 못한다는 귀여운 효효 형제 이야기에도 웃음이 나왔다. 저마다 걱정하고 생각하는 방식도, 기질도 다르지만 또 그러면 어떠리! 세상 즐거움과 기쁨은 도처에 다 깔려있는데. 무슨 줄을 잡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그 줄을 잡고 '무엇을'느끼는지가 더 중요하다.


줄이 언젠가 툭 끊어져서 멀리멀리 날아가도 내가 뛰면서 웃고 즐거웠다면 그걸 보면서 웃는 날도 오겠지.




쉬어가는 시간

나에게 필요한 행복

행복은 높이에 있는 것도, 남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연날리기의교훈

#평화누리공원

#아이들을통해배운다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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