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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화분을 받지 않고 돌아서는 상우

by 앤나우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남자의 사랑과 순정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 한 편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이 영화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바이 준》, 《동감》시절부터 유지태 배우의 오랜 팬인데(*_*) 이 영화에서 그의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로 찌질하고 불쌍해 보였다.


세상에나!


그때는 나도 어릴 때니 그렇게 경악하고 실망했던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한 적 있다면 이별 앞에서 '찌질하다'는 말이 다 뭔가. 사실, 지리멸렬하고 지긋지긋한 이별의 과정이 슬프게도 사랑에 포함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사랑으로 인한 설렘, 들뜸, 실연의 아픔, 분노, 그리고 다시 스스로를 받아들이기까지 혼자 두 팔 벌리고 소리를 듣기까지 모든 과정이 잔잔하게, 때론 마음 한 곳에 저릿하게 박히는 영화다.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은수를 만난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겨울에 만난 두 사람은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하며 흔들린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헤어져" 단호하게 답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방황한다.




최근, 다시 마지막 장면을 우연히 봤는데 영화는 역시 은수가 아닌 '상우' 중심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은수는 순박한 상우의 매력에 빠졌다 그냥 재미없어지고 권태로워지고 지루해진 걸까. 그것만은 아닐 거다. 이미 이혼을 한 번 경험해 본 은수는 그 과정이 힘들다는 걸 알기에 상우가 꺼낸 '결혼'이란 단어부터 위험을 감지하고 밀어낸 건 아닐까. 상우는 당연히 전남편이 아님에도 은수에겐 스스로 방어하고 적당한 거리가 더 좋았던 모양이다. 사랑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조차 동등하지 않다. 이 부분이 결국 갈등을 일으키거나 슬픔을 가져온다. 한결같이 미련하고 착하고 자기를 바라봐 준 남자에게 실증을 느낄게 뭐 있어, 하지만 우리는 또 은수가 아니기에 그 감정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처음부터 살펴보면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방어적인 모습과 태도를 지닌 새로운 '은수'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그녀에겐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고, 거기서 느껴지는 짜릿함을 즐기고 '모험'같은 짧은 시간으로 사랑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우연히 일을 하는데 어느 날, 손이 살짝 베는 순간, 잠깐 들어간 종이의 따가움에 은수는 그때 그 남자, 상우는 어디서 뭘 하지?를 떠올린 거다.


그냥


다시 마음이 심심하게 여유를 찾은 것뿐이다.


나쁜 X


후... 같은 여자 가봐도 진짜 나쁜 X소리가 절로 나오는 장면이다. 하지만 우리 속에 그런 모습이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상우가 울고 불고 매달리고 차키로 좍좍 자동차를 그어댈 때 한 번 더 봐주지, 왜 이제야?


사랑은 그래서 타이밍인가 보다.


시간이 지나면 지긋지긋하고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전 연인이 떠오르는 걸 보면. 하지만 상대의 마음이 나와 같다고, 지나간 시간이라고 흘러버린 시간이라고 미화는 금물이다.


《매그놀리아》 의 유명한 대사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



상우가 여기에 흔들리고 다시 헤벌쭉 웃으며 "은수씨~ "하는 것도 웃겼을 텐데 다행히도 허진호 감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상우는 온갖 지질한 짓은, 다 하고 최후 발악까지 다 해버린 후라, 이젠 더 이상 미련이 남을 게 없어 보인다. 혼자 어디에 서있어도 오롯이 그 바람을 맞고 고요히 웃을 수 있다. 사랑하는 할머니 죽음 이후, 사랑만 바라고, 오랜 시간 사랑만 기다린 할머니가 떠난 이후 상우는 그걸 깨닫는다. 갈대밭에서 은수가 아닌 혼자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 그의 표정은 지금 봐도 좋다.

하지만 의외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상우가 은수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혼자 갈팡질팡 마음에 핸드폰 벨소리를 이것저것 신경질적으로 바꾸다가 집어던지는 장면이다.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화풀이할 수도 없고 애꿎은 핸드폰만 16비트 요란한 음악이 깔리면서 상우가 폭발하는데,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단정한 이별이란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종류의 이별이든 이별 앞에 '단정'이란 표현은 역시 낯설고 생소하다. 누군가 봄날은 간다 마지막 상우와 은수의 이별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시 돌아온 여자가 상우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상우한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상우는 그냥 그대로 손을 맞잡아주고 둘은 돌아선다.

여기에 단정하고 고요한 이별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나는 좀 다르게 보인다.



나는 이 이별마저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할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산 여자의 작은 화분은 다시 그들 사이를 이을 매개체가 될 줄 알았지만 이미 화분의 주인은 세상에 없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간극이 생겨버렸다. 상우 옆에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여전히 혼자여도 "넌 아니야"라는 분명한 거절로 보였다. 이젠 거절하고 거부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다. '성장'이란 단어를 이때 써도 되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스스로를 더 돌보고 바라보게 될 줄 알게 됐으므로 꽤 아픈 눈물값을 치르고 '성장'한 건 맞는 것 같다.


스스로 다시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찾은 상우는 거절한다. 이젠 너의 흥미를 끄는 시선도 손길도, 목소리도, 라면도 먹지 않겠어. 단호함이 보인다.

제일 유명한 명대사인 '라면 먹고 갈래?'는 사실 영화를 보는 당시엔 그다지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라면으로 보여?"라는 대사가 더 임팩트 있다.



여자가 다시 돌아온 건 '여전히 미련'때문인 걸로 보인다.

굳이 정리해줄 필요도 없었던 옷깃을 만져주고 스키쉽을 해도 남자는 반응이 없자, 악수라도 청해 보는 전술을 쓰지만 남자는 그냥 마지못해 응할 뿐이다. 과거에 그리 매몰차게 당차게 자기를 버렸던 여자가 손바닥을 보이면서 잡아달라고 하니 상우는 그저 응할 뿐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다. 모든 시선은 상우에게 맞춰진다. 은수가 상우를 돌아보는 시점과 상우가 그 후에 은수를 돌아보는 시점이 어긋나지 않고 교차된다. 서로 짧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리고 안녕, 바바이.



라면 먹고 갈래?라는 한 마디의 달콤함처럼 서울에서 - 강릉을 순식간에 택시로, 차로 오고 갈 정도로 상우는 순정을 다 바쳤다. 하지만 이제 과거일 뿐이다.


은수의 단정한 이별보다는 미련과 아쉬움이 묻은 행동, 옷깃을 정리해 주는 스킨십 부분마저도, 여우 같아 보였는데, 나라면 그냥 그대로 돌아섰을 텐데 오히려 손을 맞잡아주는 상우 태도가 젠틀하게 느껴졌다.


아, 진짜 봄날도 가고 있다. 여름이 오려나보다.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 | 2001· 대한민국 · 113분 · 허진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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