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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Jul 11. 2023

불안과 슬픔을 껴안아준 기쁨이

-강점 에세이 쓰기 첫 번째 : 고유성


나는 성격 유형 검사(MBTI)에서 ENFP 유형을 가지고 있다.

에니어그램은 8번(지도자) 날개를 쓰는 7번 유형, 열정적인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은 말 중에 나를 기분 좋게 하는 말이 있다. 가장 가까운 우리 언니도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다.





신이 나경이를 만들면서 엄청 재밌었을 것 같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에니어그램, 7번 유형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장 31절 중 ) 그 좋은 것 중에서도 신께서 창조하실 때 목표하신 인간의 유형이 에니어그램 7번이라고 한다. 와, 이것보다 더한 극찬이 있을까? 심지어 나는 에니어그램을 몰랐던 20대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 말을 종종 들었는데 내가 주변인들로부터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언제나 널 보면 에너지가 넘쳐.

 힘든데도 안 지쳐 보인다.

 네가 여기 와야 분위기가 살지!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

 정의로운 수호자! 할 말 다해서 시원하겠다.

 혼자서도 잘 먹네. (혼자서 고깃집도 감 ㅋㅋ)

 웃기다, 시트콤이 따로 없는 인생, ㅋㅋㅋ

 걱정이 없어서 좋겠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서 좋아?

 남의 말 좀 들어라.



이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뭐, 동전의 양면같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하이톤과 빠른 말투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과외시절 조대연 선생님께선 이런 반응을 해주셨다.


-나경아, 요즘 어떻게 지내? 뭐 힘든 건 없니?

-(격앙된 하이톤으로) 아오, 선생님! 저 힘들어 죽겠어요!! 육아도 살림도 다 저랑 안 맞고, 애들은 또 어찌나 말을 안 듣는지,...

-하하하, 우리 나경인 늘 밝고 씩씩하네. 명랑함이 있어. 안 늙는 이유가 이거구나, 목소리도 얼굴도 고대로네. 밝아서 좋다.

- ?????

아니, 힘들다니깐!!!!

지금 지친 걸 꺼내서 말하려고 하고 있는데~~



 예전엔 나의 목소리톤, 억양이나 표정으로 받는(작은 거에도 빵 터져서 잘 웃습니다만;; 웃수저>_< ) 이런 오해들이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진짜 힘들고 아픈 사람들은 그걸 속에 꼭꼭 숨겨서 묶어놓고 감추고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슬픈 심경이라는 걸.


나는 늘 그랬다. 나의 감정, 기분, 느낌을 말하는 게 즐거웠다. '오늘 날씨가 어떠니? '라고 묻는 것처럼 명료했다. 힘들면 힘든 거고 좋으면 아주 좋고. 버럭 성질날 때 분노를 주체할 수 없지만 눈물을 흘린다거나, 큰 소리로 웃는 걸 한 번도 창피해한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나는 나의 감정을 생각하는 걸 좋아했다.



나의 강점은 감정




생각에 그치지 않고 말하고 떠드는 거, 글로 쓰는 거,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는 게 좋았다. 이야기를 사랑하고 이야기를 들을 때, 할 때, 그 순간 내 눈은 항상 반짝 빛났으며(그래서 영화와 소설에 빠졌구나) 내가 느낀 기쁨도 슬픔도 표현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소설,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말하고 듣고 소통하는 걸 좋아했다. 내가 아는 한 면이 이 사람의 온전한 전부가 아니라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모를 수 있는 누군가의 결핍과 슬픔을 알아채고 느끼는 게 좋았다. 민감하지만 특별해 보였다. 아프거나 힘든 사람에게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움직였다. 행동으로, 말 한마디로, 새우튀김을 가득 넣은 도시락으로, 선물로, 손 편지로, 그냥 토닥토닥하는 손길 하나에도 진심을 담았다.


나는 그렇게 해서 나에게 다시 돌아올 100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는 게 그저 좋았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게 뚜렷한 사람이다. 즐겁게 사는 거, 유머러스한 성격, 다정함, 남들이 못 보는 섬세함을 나는 가지고 있다.

『인사이드 아웃』, 기쁨이 되시겠다. 기쁨이는 후다닥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기쁨으로 충만한 구슬을 모으고 슬픔으로 무너져 가는 유년의 성을 보면서 울고 거기에 멈추기보다는 ‘왜’ 그런지 답을 찾기 위해 움직인다. 정반대의 슬픔이랑도 기꺼이 여행을 동행할 만큼 해결하고 답을 찾는 걸 좋아한다. 답이 불확실해도, 정답이 없어도 상관없다. 내가 기쁨을 찾기 위한 시도와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하기에. 나와 비슷한 부분을 지녔다.


세상에, 어른이 됐는데도 빙봉(상상 속의 재미난 친구/그림 속 코끼리모양을 한)에 까르르 웃고 공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빙봉'캐릭터가 나오자마자 진짜 빵 터졌다!ㅋㅋㅋ) 이런 솔직한 성격 탓에 감정 숨김이 거의 없기에 유치하고 아이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걸 고유한 '나'라고 생각했다. 그래 맞아, 나 오늘 강점 에세이를 쓰고 있었지, 마구마구 쏟아내 보자! 칭찬과 인정을 좋아하는 성격답게 페이지가 자꾸만 넘어갈 것 같다. ㅋㅋ


순진무구를 논하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지만(쭈구렁) 나는 지금도 내가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순진하지 않지만 순수한 사람. 자아실현이 다 뭐냐, 지금 이 나이에 앞가림을 치열하게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라고 말해도 나는 내 꿈과 자아가 중요하고 자아가 실현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좋다. 내가 가장 신나고 즐거운 순간이다. 지나친 이상주의자 그게 나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땐 주관식 정답 채점이 정확하게 들어갔는지 늘 담당 과목 선생님이 OMR카드를 들고 와서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정신이 없으셨는지, 내 주관식 채점표에 틀린 국사 주관식 정답을 전부 동그라미 쳐놓으셨다. 나도 모르게 손이 번쩍!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서 뭐 막을 새도 없었다.


 "아, 이거 틀렸는데 왜 맞게 해났지? 선생님, 저 이거 두 개나 틀렸는데요?"


고복례선생님께선(이름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나에게 엄청난 칭찬 샤워를 해주셨다. 살아있는 양심이라면서, 푸하하하!! 으쓱, 어깨가 올라갔다. 국사 두 개 더 맞아서 점수를 올리기보다는 칭찬받는 거 하나가 더 좋은 아이, 칭찬받기 위해서 싫증을 빨리 느끼는 성격임에도 뭐든 열심히, 칭찬받고 싶은 대상에게 꽂혀 열심을 부릴 때가 많았다. 나는 아무리 급하거나 바빠도 빨강 불에는 절대 길을 건너지 않는다. 빨강 불 하나에 양심을 팔기가 싫기 때문에. 늘 그 생각을 했다. 내가 알고, 하늘이 이미 알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이가 아무도 없어도 내면에선 내가 다 지켜보고 있다. 신께서 나를 보고 뭐라고 하실까. 이 부분이 나를 좀 더 책임감 있고 성실한 사람으로 바꿔 놓았다.







내 머릿속은 늘 아이디어가 넘쳤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공상이  발전해 나에게 창의성을 선물해 줬다. 남들과 똑같지 않은 다른 뭔가를 찾고 만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내가 나에게 만족했기에 누군가에게 어울리지 않은 반짝이 옷도 사람들이 '어울린다'라고 말해줬다. 내가 좋아하는 게 언제나 제일. 남들의 시선을 따라가고 지나치게 눈치 보거나 주눅 들지 않는 거, 물론 쭈구리가 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말하고 털어버리고 별로 개의치 않는, 그게 바로 나다.




내 주위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내가 모으지 않아도 내 자리로, 내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날은 전철을 탔을 때 옆 자리 어느 신내림 받은 무당 아주머니가




얼른 장사를 시작해! 물건만 사려고 하면 막 주변으로 사람이 모아들지 않아?
 너는 사람들이 절로 모여.
손도 바지런하고 장사를 해야 해.



흠, 이 와중에도 왜 반말을 해? 어이없어서 '나 알아요?'라고 물었다가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아서 웃어넘겼지만 실제로 그랬다.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갈 때 다음날 누구랑 앉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늘 같이 앉자는 친구들이 많았다. 사람이 없는 고요한 가게에 들어가도 갑자기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 때가 많았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면 나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내 자리를 맡아놓고 기다리는 친구들, 나와 함께 하길 즐거워하는 사람들, 중요한 건 또 그렇다고 사람에게 끌려다니기보단 끌고 가는 걸 좀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다 힘들면 그냥 또 놓기도 하고, 혼자서 편하게 있고.


내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이 생각이 언제나 지배적이었다.

『엄마를 부탁해(신경숙작가)』 속 지고지순한 엄마가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소설도 재미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우리 엄마도 그러지 않았기에, 엄마의 희생으로 얻는 게 뭐지? 나를 희생하고 다 가져다가 바칠 만큼 가치 있는 일이 과연 아이를 받드는 일일까, 아이랑도 나는 '함께' 즐겁게 성장하고 싶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친구들이 나에게 와서 좀 더 깊은 속을 보여주고 꺼내주는데 난 그게 늘  궁금했다.  내가 워낙 내 감정을 솔직하게 다 말하니까, 그게 촉매가 된 걸까. 원래 여자들끼리 또 뭔가 털어놔야 비밀로 끈끈한 사이가 되는 것처럼 공유하고 그 물꼬를 내가 텄기 때문일까. 나는 나의 아픔, 힘든 부분을 이야기하다 눈물이 터질 때  한 번도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한 적이 없다. 그냥 내 감정이, 눈물이 그렇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편견이 없고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기에 (푸핫 ㅋㅋㅋ 이건 나의 상담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 입니다만) 감정의 동요가 세고 조울의 증상이 보여도 멈춰있기보단 답으로 향해가는 이야기가 있기에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가 중요한 것도 사실 여기에 더 집중해서 불안을 잊어보려는 몸부림인데 내가 집중하니 스스로 그 안에 몰입돼서 재미를 찾는 경우들이 많았다. 선택과 몰입, 나의 방향성을 누군가 잡아준다면 나는

어마어마한 각오로 일낼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나도 안다.



선택과 몰입




큰 아이 선재를 낳고 듣도 보도 못한 역사 인물, 조헌 칼럼을 쓸 때도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밤이 새도록 일을 했다. 어렵고 극한 상황일수록 내가 그 일에 더 선택과 집중, 몰입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탐닉이라는 또 다른 덫에 걸리기도 하지만 이건 나의 큰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쓰면 쓸수록 집중되고 하면 할수록 요령이 붙고 나는 그런 걸 좋아한다. 카페 아르바이트에서도 다양한 가짓수의 주스와 커피를 만드는 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인애플 다듬는 걸 배울 때조차 신나고 재밌었다. 인생에서 배우는 뭔가가 늘 나에게 어느 순간 모르는 것보단 도움이 된다고 여겨졌기에. 커피 머신에서 탁탁 커피를 내리고 주변을 깨끗하게 털어서 알루미늄 템퍼로 꾹 누르는 것부터 별 거 아닌 그 시작, 처음 만든 내 첫 작품 커피가 나왔을 때의 기분도 생생하다. 창조하고 쏟아내고 만들어가는 모든 일에 설렘이 장착 됐다. 하나님도 이러셨을까? 내가 지금은 미숙하여 비록 똥 모양의 찌그러진 생크림을 캐러멜 마끼아또 위에 올려도 언젠가 내 생크림이 제일 완벽하게 올라가는 걸  상상하고 즐거워했다. 모든 일이 익숙해지고 손에 익기까지 과정은 즐겁고 설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 상상력이 나를 춤추게 하고 더욱 몰입하게 한다. 일 배우는 속도가 남들보다 빠른 건 아니지만 뭔가 닥치고 주어졌을 때 힘든 일일수록 바쁘게 와다다다다 일하고 쉬는 걸 좋아했다. 무슨 일을 하든 즐기면서 했다. 카페에도 오히려 바쁘게 빙수 주문 15개, 커피 스무 잔, 이런 상황에서 신나서 일할 정도였으니까. 할 말을 다 해도 말투나 웃음이 생글거려서 그때 카페 실장님도 나에게 바리스타 공부를 더 시켜줄 테니 같이 일을 해보자는 제안도 하셨다.


 나는 돈이 걸려있고 내가 해야 하는 일엔 책임감이 강하다. 아이들 언어영역 과외를 할 때도 수능 참고서를 와장창 다 사서 한 문제씩 풀어봤다. 가르치려면 아는 게 중요했고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었기에.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수능 언어영역을 다시 공부하는 나를 보며 우리 아빠는  




진작 좀 하지, 서울대 갔긋다!



그만하고 잠 좀 자라고 하셨다. (*아빠, 그래도 서울대는 못 갔을 것 같아요. 나는 수학을 너무 싫어해서 ㅋㅋㅋ) 계기와 책임이 생기면 나를 바꾸기에 주저함이 없다. 주저함이 다 뭐냐, 불타오른다. 덕분에 늘 아침에 잠들었던 야행성 습관도 아이들의 탄생과 함께 개운!  미라클 모닝 인생을 살고 있다. 진짜 미라클 새벽은 아닐지 모르나, 나에겐 장족의 발전인 것 같다. 내가 8시에 아이 아침을 챙기다니!


아침 먹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고봉밥으로 눈 뜨자마자 먹고 밤엔 아주 꿀잠을  잔다. 과거엔 과거대로 늦게 자는 삶이 좋았다면 지금은 또 그와 반대로 푹 잘 수 있으니 이건 행복한 인생 아닌가. 아이들 덕분에 내 식사도 거르지 않고 놀이터에서 하도 놀아서 불면증도 사라졌다. ㅋㅋㅋ


나는 구원서사, 성장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왕자가 공주를 구하고 나서는? - 에 그치는 서사가 아니라 공주가 왕자를 구해요!(영화 『프리티우먼』 마지막 대사)처럼 같이 성장해 가는 과정이 좋다. 아픔과 눈물이 따르지만 사백번의 구타(영화 『사백 번의 구타』/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일방통행은 싫지만 쌍방 교류와 상호 관계의 성장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는 요소이다.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좋아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그냥 아무 데나 가서 사람들만 구경해도 재밌다. 전철 안에서도 사람들을 보길 좋아하는데 대놓고 못 쳐다봐서 아쉬울 뿐. 관찰은 성찰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다. '왜'라는 질문이 결국 닿아있는 곳에 성찰이 있었다.




나의 가장 큰 강점은 내가 별로 싫지 않다는 점 같다.



하루키 소설 중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 와타나베 도오루가 자긴 '뭐 이 정도 얼굴에 만족하고 자기 자신에 별다른 제약보다는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아.'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을 읽고 하루키가 엄청 잘생긴 줄 알았지, 나는;;;ㅋㅋ) 수많은 번뜩이는 구절, 신선하고 변죽을 울리는 문장들 속에서도 저 말이 좋았다.


남들이 뭐냐?,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도 그런 편이다. 내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진 적이 없다. 아니 콤플렉스가 뭐야, 꽤나 만족하는 편이다. 나는 거울을 보는 게 즐겁다. 거울만 보여도 스쳐 지나가는 유리에도 꼭 나를 비춰본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기에.



나와 고교 동창인 소울 벗, H가 자긴 그냥 사회의 일원, 소시민,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한 사람 같다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너무 슬펐다.




아니야, 주인공이야! 너는 네 인생에서 주인공이고 나는 내 인생에서 주인공이고.


그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어렸을 때부터 늘 머릿속에 끓어오르는 물음표 하나가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나는 왜 네가 될 수 없고 나인가? 였는데 내가 찾은 해답은 내가 그냥 내 삶에서는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대신할 수 없는  주인공이라는 것이었다.


각자가 일인칭 소설로 쓰인 전지적 일인칭 시점주인공, 그리고 내 마음은 전지적 작가인 나와 나를 창조한 신만이 아는 설정.


어린 아가일 때는 엄마 손을 잡아도 이게 누구 손이고 내 손은 뭐고 엄마 손이 뭔지 구분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차츰 아기는 자라면서 얼굴을 마주하고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통해 나를 보듬어 주는 타인에 대해 인식 을 하고 인지하기 시작한다. 나는 언제나 내가 왜 남과 다를까? 내 감정의 출발이 어딘지 따져 묻곤 했는데 그게 눈물과 발광이 된 순간이 있어도 내가 나인 게 좋다. 자명한 진실.


나에겐 내가 뭐만 해도 나를 보듬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 보석 같은 사람들. 내가 화장실에서 노래를 부를 때나,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을 때도 '잰 원래 저런 애야'라고 나를 인정해 준 그 말이 좋았다. 내가 뭔가 싫은 소리를 해도 조금 어긋나도 그래도 나경인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아,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은 나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 대해 끊임없이 쏟아내고 내 이야기하는 게 좋다. 비록 맞춤법 띄어쓰기가 개판이어도(이젠 알아서 고쳐주기 기능도 뛰어납니다, 핫핫) 이렇게  쏟아내고 글로 와다다다 쏟아내고 나를 돌아보는 게 좋다.



성찰!


죄책감이나 스스로 구덩이에 빠지기보단(물론 그럴 때도 있었습니다만) 이불 킥하고 그냥 웃고 쉽게 잊는 걸 선택했다.  또 다른 불안이 있기에 또 뭐 거기에  집착할 필요도 없는 거 같다. 스칼렛 오하라처럼(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 주인공 비비안리) 투마로우 이즈 어나더 데이, 더 멋있게 번역한다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라는 그 말을  좋아한다.


아무리 나를 요동치게 했고 불안하게 했던 그 감정도 아침이 되면 햇살에 날아간 적이 많았고 쉽게 빠르게 다른 곳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아마 동적으로 계속 움직이고 뭔가 또 다른 몰입을 찾아갔기에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다.



너를 보면 웃겨, 인생이 아주 코미디야.



그래, 나 같은 사람도 뭐 필요하지 누가 비웃어도 나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나는 또 안다. 내가 우스운 사람이 아니란 걸. 그냥 좀 귀여운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눈길들에 힘이 솟아난다. 사실, 누군가의 눈길이 없어도 나 자체로도 신나는데 인정을 받으면 더 즐거워진다. 남들이 아니라 나 스스로 우습지 않은 '나'를 아는 게 더 중하다고 생각한다.


찢어지고 너덜한 티셔츠를 입어도 그게 좋으면 입고 다니고 아이가 놀이터에 죽치고 안 가도 끌고 가서 좀 더 어르고, 달래고 쉬면 그만이다.



 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안다. 일상. 우리에게 남는 게 일상뿐이란 걸 알기에(카프카의 말) 어느 날 아침 벌레로 태어난 그레고리 잠자처럼(카프카/『변신』)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 좌절하고 집콕 방콕 박혀있기보다는 나는 또 벌레의 모험처럼 밖으로 기어나갈 것 같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쇼 박사님처럼(누미 라파스) 나는 로봇 데이비드(마이클 파스빈더) 머리통을 떼서라도 똑같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누가 나의 근원이고 시작이고 아는 그 호기심 하나 때문은 아니다. 나를 알고 찾아가는 과정이 소중하고 귀하기에. 이 부분을 쓰다가 신이 나를 왜 창조했는지 나의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도 그려봤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 믿음이 아닐까.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


다시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로 돌아와서, 우리는 누구나 안다.


기쁨 그 자체가 시작이고 끝이 아니라 오히려 슬픈 일 뒤에 큰 기쁨이 온다는 것을. 아니, 슬픈 일을 누군가 위로해 주고 껴안아 줬을 때 그 자체의 기쁨은 찾을 수 없어도 사람은 성장한다는 것을. 불안과 슬픔을 몰랐더라면 내가 어찌 기쁨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발 동동 구르고 에너지 업된 기쁨이를 꽉 끌어안아주고 싶다.


이제 괜찮아, 너무 기쁨만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가까운 곳에 깔린게 기쁨인걸.


바닥으로 내려간 것 같은 감정 상태에서도 나는 잠잠히 기다린다. 아, 잠잠히 는 아닌가, 이렇게 글도 쓰고 수다도 좀 떨고 맛있는 것도 골라서 먹고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내 시간을 가지면서,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뛰놀면서 ㅎㅎㅎ 기다린다. (뭐, 기다리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튀어 오르는 공처럼 내 감정이 다시 솟아나고, 하늘을 뚫을 기세가 아니어도 나는 살짝의 바운스 만으로도 즐거운 사람이라는 것을. 나를 알고 있어서 기쁘다.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피트닥터 감독(2015년작)/ 102분/ 전체 관람가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아흑,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다른 출처는 못 달겠다. 오늘따라 번뜩이는 여러 가지 책과 영화가 더 많았기에. 다른 날 마음이 내킬 때 달거나, 아니면 내버려 두어야지. 그냥. 그러면 어때.


자러 갈 시간이다. So long farewell, 소 롱 페어 웰,

Short farewell, 어찌 됐든 굿 나이트 쿠쿠.




글 쓰는 오늘 Season13 우리들의 글루스 III
일곱 번째 일기

*시즌14 글로 코칭
 강점 에세이 쓰기
 첫 번째 : 고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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