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나들이 II
(물론 유물을 보는 우리가 있긴 했다)
올여름에 재밌게 봤던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오프닝을 내 마음대로 패러디하기
처음 들어간 불교관에서 적어도 나는 내 심장의 쿵 소리를 들었다.
심선생님의 추천대로 신라, 조선의 석불과 불두, 고려의 철불을 둘러봤다. 거대한 크기만으로도 압도당할 것 같은데 사실 중요한 건 크기가 아니라 얼굴과 유려한 몸짓,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란 걸 느꼈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두 발을 땅에 붙이는 것조차도 어려워서 늘 양 발가락에 힘을 꼬옥 쥐고 발 하나를 바닥에 펴놓지도 못하는 큰아이를 보면서도, 바깥에서 긴장을 많이 한 탓에 집에 오면 피로감과 허기를 더 많이 느끼는 신랑을 보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건 뭘까? 생각했다. 나는 화려하게 꾸며지거나 지나치게 의기소침한 모습보다 늘 자연스러운 모습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어느 환경에 내던져지더라도 가장 편안한 장소, 사람들, 공기, 냄새, 시간을 찾아가는 게 바로 자연스러움이라고 생각했다. 맞아, 내가 먼저 편안해야 자연스러울 수 있다. 삐걱삐걱 초긴장 상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쉬는 시간조차 자연스럽게 쉬지 못할 때가 참 많은 현대인이다. 너무 많은 곳에 노출되고 어쩔 수 없이 나를 노출하는 순간도 맞닥뜨려야 하기에.
불상은 가장 자연스러운 몸짓과 표정을 하고 있다. 손이 잘려서 없는 고려의 철불조차도 양손이 없어도 원래 어떤 포즈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다. 코와 입술이 뭉개진 불상들도 모두 하나하나 뜯어보면 평온하기 그지없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하다. 고개를 숙이고 중얼중얼 수행을 하거나 고뇌하는 표정은 하나도 없다. Nirvana(내가 좋아하는 커트 코베인이 있는 밴드기도 했지만)를 경험한, 초월한 사람들의 표정이 딱 이럴까 싶기도 하다.
사실, 근데 그 모든 포즈를 따라 해보려 하면 그 자세가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한 지 바로 알 수 있다. 수련의 자세, 특히 여러 모양의 수인을 보고 있노라면, 손가락에 쥐가 날 것 같기도 하다.
불교가 성행했던 신라, 고려 시기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승려들도 천민의 지위로 떨어지고 도성 출입이 금지된 조선시대의 부처의 얼굴은 어딘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함께 관람하는 혜진쌤이 각 시기마다 조금씩 다른 불상의 얼굴과 특징을 이야기해 준 덕분에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확실히, 고려 시대가 부유하고 풍부해 보인다. (나만의 생각이다) 후덕과 둥글둥글 느낌이라면 조선시대는 얄팍하고 조금 더 길게 이어진 눈매, 뾰족한 코 같은 부분이 조금 야윈 듯도 하다. 억불이 어딘가 그림자를 그린걸수도 있겠다고 상상하며, 그럼에도 역시 고뇌보다는 '보는 것 자체로'편안한 자연스러운 표정들이다. 자꾸만 돌아보고 싶게 만드는 묘한 얼굴들, 현실에서도 저렇게 목주름이 세 개씩 잡히는 사람에게 과연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ㅎㅎ
허리를 펴고 가슴은 열고 어깨는 힘준 흔적이 전혀 없이 아래로 툭, 최대한 힘이 들어가지 않는 표정과 얼굴들에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찾아올 '평안'과 '행복'을 바랐겠구나 생각해 봤다. 돌을 새긴 석공의 얼굴을 닮은 건지, 거푸집을 만든 장인의 표정을 새긴 건지 전부 알 수 없으나 이런 표정 속 자연스러움을 찾았음에는 틀림없다. 어느 각도, 어디서 봐도 웃음이 났다. 예수님을 조각한 조각가보다 불상을 조각한 석공, 장인들과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도 했다.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사실 불교의 경전 하나 모르는 '무지'의 상태기에 더 끌리기도 하고 우리 조상들의 오랜 근간을 버티게 해 주고 함께 해온 종교기도 하기에 어떤 힘이 있을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우주를 두루 비추는 태양빛과 같은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부처다.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불이기 때문에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7세기 무렵 중국에서 불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오른손 검지를 세워 왼손으로 감싼 지권인을 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형상화하기 어려웠던 '진리'자체를 처음 표현했던 중국 불상을 보고 싶어졌다. 가르침을 상징하는 부처답게 어떤 미동도 흔들림도 없이 평온 그 자체를 보여준다. 진리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 하나만 세운 왼손가락은 우주 안에 작고 연약한 나를, 그 손가락을 감싸는 단단한 오른손 전체는 우주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불교가 아니어서 보면서 내 멋대로 한 상상이지만, 왠지 손가락으로 감싼 우주 자체가 여리고 여린 나를 버텨줄 진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위안을 받았다)
인도관의 다양한 불상들과 보살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장르(?)가 바뀐 느낌이 들었다.
'어머어머, 이 불두는 가지고 싶다'라고 말한 혜진쌤 말에 빵 터지기도! ㅎㅎㅎ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공감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미남들! (미의 기준이 다른 것 같아도 이럴 땐 통일된다) 향토적인 얼굴의 그래도 친숙한 우리의 부처상을 보고 온 후라 그런지, 이목구비들이 아이돌급으로 표현된 상들은 신기하고 신선했다.
불교의 시작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일까,
(*간다라는 사실 인도가 아니고 중앙 아시아의 쿠샨 왕조때 불상이 만들어진 곳이니 불교의 시작이 아니라 불상을 처음 만든 곳이라고 봐야 한다 >>심선생님의 옥의티 수업 : 감사합니다)
수염이 있는 불상이라니, 멋쟁이들이 기를법한 콧수염부터 시작해서 늘어진 듯한 여유로운 자세가 어떤 엄격하고 근엄한 신의 모습을 표현한다기보다는 그 모습 자체로 당시 사람들의 모습 속에 녹아있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각 나라의 불상들이 그 당시 문화와 삶을 반영하는 건 물론, 당대의 소망과도 떼려야 뗄 수 없겠지만 이렇게 여유만만, 그냥 늘어져도 되나 싶을 정도의 모습들은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줬다. 두려움, 경외의 존재보다는 삶에서 느끼는 기쁨을 가득 담은 것 같아서 인도관의 불상을 관람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물론, 잘생긴 조각 같은 얼굴들도 한몫했겠지만. ^_^
▶ 혜진쌤의 감상을 보려면 여기
▷ 심선생님의 감상도 여기 함께 (*두 편을 골라봤다)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어서 유물로 마주해야 하는 곳이 박물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작품을 조각한 조각가의 마음을 모를 뿐이지 어떤 생각, 마음은 통하는 것처럼 읽어낼 수 있는 풍부한 소망과 진리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예술로 남아있는 작품을 감상하는게 어떤건지 어렴풋이 떠올려 본 하루기도 했다.
지권인을 보면서 우주 안에 떠도는 보이지도 않는 먼지 같은 나를 꺼내준 하나님을 떠올렸다고 하면 누군가 내 말에 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인걸. 나는 불상을 통해서 어쩌면 또 다른 내 모습을 보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내 심장의 '쿵'하는 소리는 내가 불상 덕후였다는걸 깨달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덕후일지도 모르지만 ㅎㅎ) 내가 알지도 못하는 먼 과거의 누군가의 삶이(나는 우리 조상을 이렇게 오래 생각해본 것도 실로 처음이었다), 얼굴과 손가락에 드러나고 표현되는 소망으로 실현된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단 하나'의 마음을 떠올렸기 때문인걸까. 더없이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다.
혜진쌤 역시 나와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저는 지장보살이 가장 좋아요.
미륵 하면 궁예가 먼저 떠오르지만, ㅎㅎㅎ
지장보살은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지옥에 떨어지는 걸 구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잖아요.
단 한 명!
*지장보살 地藏菩薩 미륵이 오기 전까지 부처가 없는 세상에서 끝없이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 여느 보살상과는 달리 민머리 또는 두건을 쓴 승려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작고 조그만 동자처럼 보였던 지장보살, 단 한 명!이라는 말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겉은 화려하고 어마어마하고 섬세한 광배와 아름다운 연화좌에 둘러싸여 있지만 사실 불상 자체는 아무 욕심이 없어 보이는 표정들이 인상적이었다. 꼬마아이, 동자승처럼 보이기도 한 지장보살의 모습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들에게서 좀 더 깊고 넓은 마음을 배워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엔 나도 심선생님처럼 조금 더 빨리 와서 둘러봐야지, 문 닫는 시간이 아쉬웠던 박물관 나들이.
선생님이 보신 국립중앙박물관의 매력을 나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여기서도 달리기처럼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 혹은 두 개의 관을 관람하더라도 반드시 기록해야겠다. 처음뵌 숙희 선생님의 단아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작품에 접근한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다음엔 박물관에서 떠오른 영감으로 직접 만든 선생님의 작품을 볼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