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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우구데 Nov 16. 2024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2024년 9월과 10월, 팀은 흔들려도 서포터는 박자를 놓치지 않는다

2024년 9월, 무려 오 년을 끌어왔던 프로젝트가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내 짧지 않은 회사생활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프로젝트였다. 처음으로 리딩을 맡았지만 일체의 인수인계를 받지 못한 채 시작되었고, 고객사에서 핵심 프로젝트로 관리되고 있었던 만큼 기대가 컸지만 이전 프로젝트들처럼 성공이 당연시되는 과제였다.


과제의 난이도가 높았던지라 몇 달간 제출했던 샘플들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매니저가 내게 데일리 미팅을 제안했고, 나는 고민과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였다. 월요일에는 부서장 앞에서 한 주 간의 성과를 발표하고,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매니저와 그 전날의 실험 결과와 오늘의 실험 계획을 논의했다. 매일 아침 아홉 시에 그렇게 미팅을 하고 나면 열 시부터는 실험실로 달려가서 일했고, 그렇게 모으는 데이터를 PPT로 만들 시간도 없어서 매니저와의 미팅은 엑셀 파일의 데이터를 그대로 띄워놓고 하는 날도 있었다. 숨 쉴 틈 없이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서 제출했던 샘플들에게서 '개선 없음' 피드백이 돌아오면 맥이 빠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어느 순간 내 목표는 전쟁의 승리가 아닌 전투에서의 생존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의 최전선에 서있는데 모두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나마 고충을 털어놓았던 동기들의 이직 소식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날 선 이야기들은 내 의지를 흔들었다.  ‘박사학위도 없는 내가 연구직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불안이 끊임없이 나를 옥죄었다. 몇 년간 쌓아온 경험과 자신감도 프로젝트를 리딩하며 느낀 막중한 책임감 앞에서는 알량해 보이기만 했다. ‘차라리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프로젝트를 바꿔달라고 말해볼까, 다른 직군이나 회사로 옮겨버릴까’ 하는 타협과 회피의 유혹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이 프로젝트를, 연구직 자체를 그만두더라도 스스로에게 떳떳할 만큼 죽을힘을 다해서 해보고 그만두고 싶었다. 함께 했던 매니저가 '머리 박고 했다'고 표현하는 시간들의 끝에서 나는 결국 방향들을 찾아냈고, 고객사의 요구 조건을 맞춰내며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가사로 삼아 만들어졌던 노래가 있었다. 처음 그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던 어렸던 나는 흔들리지 않고 피워보겠다는 다소 맹랑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정말 이 악물고 버텨서 승리하는 경험을 해본 나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성공 비법을 물어오는 동기와 후배들에게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라고 말해주면 대부분 그 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돌아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떠오른 그 노래를 속으로 부르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마다 정답은 다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게 정답은 흔들림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서 이겨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힘들게 했던 그 프로젝트가 종결되던 9월부터 수원에게는 힘겨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9월과 10월에 치른 9경기의 성적은 3승 4무 2패. 승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승점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성적표였다. 내 자리는 훈련장과 그라운드가 아닌 서포터석이기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팀이 흔들리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만 봐야 했다. 그저 우리팀에게도 이토록 흔들리는 시간이 피어나기 위한 과정이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불현듯 선수단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주전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선수들과 바로 직전 경기에서 경기력에 대한 비판을 받았던 선수가 선발 명단에 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기들 사이의 간격이 짧은 시기였기에 선수들의 체력 관리를 위하여 로테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천안과의 경기에서는 고참 선수 둘이 각각 부상과 퇴장으로 빠지자 남은 선수들이 혼란에 빠졌고,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실점을 허용하며 패배해버렸다. 부천을 상대로는 '어느 선수의 어떤 킥을 막아라'라고 사실상 정답지를 쥐어준 하프타임 코칭에도 불구하고 막으라고 했던 그대로 실점해버렸다. 이 모든 모습을 보며 분명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선수단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결국 경남 원정에서의 락커룸 토크를 통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변성환 감독님은 평소 쓰지 않는 사투리 억양을 숨기지도 못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연습할 땐 하고 여기선 왜 못 하는데? 왜 훈련과 경기를 따로 하냐고 지금!" 감독과 코치들이 철저하게 분석하고 고안해 내서 훈련시킨 치밀한 전술들이 경기 당일의 그라운드에서는 전혀 구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은 결국 ‘부담감’이었다. 강등 첫 해에 반드시 승격하겠다는 목표와 기대는 감독과 코치, 선수단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서포터들이 모두 함께 나누는 염원이었다. 하지만 그 압박감과 기대는 선수단을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고, 매 경기마다 그들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제대로 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산전 패배 후 변성환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조금 부담을 갖는 게 사실이다”라며 마음의 무게를 인정했고, 성남전에서는 김도용 코치가 “애들 스스로가 뭔가 무게감을 좀 느끼는데... 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라며 우려를 표했다. 당시에는 무심코 흘려들었던 이 말들이 선수단이 무게감에 짓눌리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단서였던 것이다.


부담감을 느낀 것은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감독님 역시도 그 무게에 직면하고 있었다. 안양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그는 “어느 순간에 승리를 하면 예전에는 너무 좋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도 많이 밀려온다. 공허함과 허무함도 있다가 기쁨도 있다”고 고백하며 지쳐가는 마음을 내비쳤다. 또 다른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는 ‘같은 승점과 무승부를 기록했을 때, 상대는 승격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우리에겐 물음표라는 말을 쓴다’고 말하며 수원의 감독으로서 짊어진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드러냈다.


서포터석에 있는 나도 점차 지쳐갔다. 서포터석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 혼자 소리 지르고 있는 것 같은 고독했던 그 순간, 나는 그날의 패배를 직감했다. 책임을 언급하는 감독님의 경기 후 인터뷰에서 '성적에 대해 책임지겠다'며 떠난 이전 감독들을 떠올리고는 움찔했다. 또 다른 패배를 거둔 날에는 서포터석 일부에서 야유가 나왔고, 나는 그 소리를 응원가로 덮는 반다와 콜리더에 목소리를 더해주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야유를 나사나수로 덮는 그 마음으로, 그 어떠한 날에도 그대들의 뒤를 지키겠다”며 SNS에 서글픈 다짐을 남겼다. (*나사나수: '나의 사랑, 나의 수원' - 수원의 대표 응원가)


수원을 위한 응원가를 부르면서도 막막함에 주저앉고 싶고, '힘을 내라 수원'을 외치는 그 순간이 비참할 정도로 간절했던 날들이었다. 무승부와 패배만 있던 시기, 변성환 감독님은 락커룸으로 도망치거나 선수들 뒤에 숨는 대신 가장 앞에서 서포터들에게 인사를 했다. 패배에 대한 책임에 대해 인터뷰하고 락커룸으로 돌아온 그는 고개 숙인 선수들을 비난하는 대신 다독였다.  


“여러분들 능력은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 이길 때도 질 때도 있지만, 졌을 때 우리 팀이 얼마나 더 좋은 문화를 가지고 있고, 서로 더 많이 신뢰하고, 이런 패배로 인해 우리 팀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우리가 보여주는 게 정말 좋은 팀이고… 그런 모습들을 팬들도 원할 거야. 감독님은 너네 믿고 있어. 한 번 하자. 해야지.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하냐. 다른 팀이 1부 리그 올라가는 게 말이 되냐. 우리가 해야지. 감독님 믿고 같이 하자. 힘들어하지 말고, 오늘 또, 다 같이 힘내고 가자.”


의연하게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빨개진 코끝을 숨기지 못한 감독님의 그 모습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고 버티는 그의 모습에서, 내가 가슴 조이며 버텼던 낮과 고민하다가 지쳐 잠들었던 밤들의 무게가 겹쳐져서 가슴이 저렸다. 정면돌파를 택하는 의연함 뒤에 두려움을 감추었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먹먹하기도 했다. 그를 포함한 이 팀도 흔들림을 이겨내고 끝내 피어나기를 바라며 나는 또다시 예매를 하고 경기장을 찾았다. 그래, 해야지. 우리가 해야지!




힘겨운 시간 속에서 수원은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감독실에는 평소에 팀을 위해 헌신하던 선수들이 한 명씩 찾아갔다. 이종성 선수는 (스스로는 아니라고 기자에게 극구 부인했지만) 밤늦게 감독실을 찾아가 팀을 걱정하며 펑펑 울었다. 하필 그는 천안전에서 부상을 당해 적어도 몇 주는 경기에 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경기라도 빨리 복귀해서 팀에 도움이 되고 싶었던 그는 첫 아이가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재활센터에서 회복과 운동에 몰두했다. 강현묵 선수 역시도 감독실을 찾았다. 평소에는 정체 모를 춤을 추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 역시도 천안전 이후에는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 속 동료들이 '올해는 안되나보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이 팀에서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축구 인생 처음으로 동생들을 불러 모아 미팅을 진행하고 본인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락커룸에서는 베테랑 선배들이 나섰다. 김현 선수는 강등과 승격 경쟁을 모두 겪어본 베테랑으로서 팀을 위해 누구보다 단단한 모습으로 쓴소리를 담당했다. 선수단의 부담감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당연히 받아야 한다. 그걸 안 받으면 안 된다. 주눅이 드는 모습이 운동장에서 보여선 절대 안 되는 일이다. 오히려 더 자신감이나 힘을 받아서 뛰어 줬으면 좋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날에도 그는 '아직 웃을 때가 아니다. 마음가짐을 계속해서 무겁게 가져갔으면 좋겠어' 라고 단호하게 몰아붙였다. 승리하고도 차분하게 말하는 그의 무게감에 옆에 있던 후배 선수가 조용히 팬들에게 선물 받았던 치토스 봉지를 내려놓을 정도였다. 김현 선수는 특이하게 ‘전투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오늘 내가 생각했던 선수들의 의지나 전투력이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진짜 너무 좋았던 거 같아."라고 말하며 모두의 결의를 굳혀주었다.


주장인 양형모 선수는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로 경기장 안팎을 챙겼다. "내가 내 자신을 믿는 것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우리가 주목을 해야 될 것 같아. 우리가 가진 이런 직업의 특성이 팬이라는 문화가 있어. 그런 문화에 보답할 수 있는 마음도 나는 가져야 된다고 생각을 해. 각자 아쉬운 점도 있을 수 있고 이렇긴 한데, 그런 건 또 숨길 수도 있어야 돼. 노력은 개인이 해야 되는 거고, 경기장 나갈 때는 우리로 나가는 건데. 그때 우리가 우리로서 보여줄 수 있는 노력을 각자 잘 해야 될 것 같아.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할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그는 프로 운동선수가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정신력부터 후배 선수들에게 일러주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필요한 날에는 따끔하게 지적을 하기도 했다. 홀로 열몇 번의 슈팅을 막아내며 간신히 무승부를 지켜냈던 부천전을 끝내고 그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얼만큼 노력했고, 이런 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거는 없는 것 같아. 우리는 무조건 결과로 이야기를 해야 되고 그 결과를 못 가져왔을 때 오는 여러 가지 일들은 감수해야 돼. 조금만 진짜… 강한 책임감을 좀 가졌으면 좋겠어."


모두가 힘들어하는 부담감에 대해 "결국 선수 개개인이 이겨내야 한다"라고 말하며 김현 선수와 마찬가지로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선수단을 대표하여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수원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으로 살아가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채워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만 선수로서 감히 이기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오늘 경기 90분에 함께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수단 또한 이 90분에 모든 것을 쏟겠습니다. 그 하루하루를 쌓아서 희망을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후배들을 감싸고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참들이 나서서 락커룸과 그라운드 모두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나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일어서기 시작하는 모습은 마치 단단한 벽이 세워지는 것 같았다.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도 응원가의 박자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목소리를 높이며 기다려온 서포터들 앞에 이제는 단단해지기 시작한 선수들이 나타났다.




9월 말, 원정을 떠난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성남으로 향했다. 동료 서포터들과 함께 응원소리를 견제할 목적으로 귀가 아프도록 컸던 홈구장의 앰프 소리를 우리의 목소리로 이겨냈다. 그리고 선수들은 뮬리치 선수의 페널티킥 실축과 선제 실점으로 인해 불리했던 경기를 이겨냈다. 승리를 거두고 서포터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선수들을 위한 이날의 마지막 응원가로 콜리더가 '알레 알레 수원 알레'를 선창했을 때, 울컥하는 마음에 "와 씨…"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응원가는 지난 5월에 같은 곳에서 패배 후 돌아가는 선수들에게 불러줬던 곡이었기 때문이다. 초라했던 예전의 기억과 불안했던 최근의 성적을 안고 나섰던 원정길을 벅찬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날이었다.


10월의 시작에는 안양과의 이번 시즌 마지막 지지대 더비가 있었다. 8월부터 세 번의 패배를 겪는 동안 단 한 번만의 승리를 거두었던 어려운 시기에 하필 리그 1위 안양을 만났다. 반대편 원정석의 안양팬들에게 응원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만큼 수원이 다시 힘을 내기를 바라는 간절함이었을까. 서포터들은 평소보다 이르게 경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응원을 시작했다. 선수들의 입장에 맞춰 단체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감독과 선수, 그리고 서포터가 어깨동무를 한 그림이 그려진 통천이 위에서 당기고 아래서 밀어 올리는 현장팀과 N석에 자리한 많은 서포터들의 손으로 펼쳐졌다. 통천 아래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수원의 상징인 청백적 카드섹션이 펼쳐졌다. 두 종류의 단체응원이 동시에 펼쳐진 이 장면 속 내 위치는 가운데의 가장 앞줄이었다. 서포터석 신입들인 것 같은 동료들에게 "통천 올려요!"라고 알려주고, 통천이 지나간 다음에는 하얀 도화지를 들어 올리며 나 역시도 이 팀의 일부임을 절절하게 느꼈다.


내가 예매했던 자리를 대형기에게 내어준 탓에 나는 콜리더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온 힘을 다해 뛰며 응원가를 부르고 팔을 휘둘렀다. 그 사이에 틈틈이 사다리 위에서 팔을 뻗는 콜리더에게 물병을 건네주었다. 어렵게 터진 한 골로 승리가 결정되는 순간에 우리는 마침 '바모 밀료나료'라는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사랑’과 ‘모두가 부러워할 낭만’을 담은 노래였다. 승리를 자축하며 서포터들이 던지는 치토스 봉투들 사이로 나는 가지고 왔던 ‘우린 절대 포기하지 않아’라고 적힌 머플러를 던졌다. 그 머플러의 주인은 이날의 도움을 기록하고도 본인의 경기력에 만족하지 못해 투덜대고 있던 박승수 선수가 되었다. 머플러를 두른 선수의 모습을 보며 그가 여름 행사에서 내 응모권을 뽑은 덕분에 그의 사인이 담긴 운동복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 애장품을 하나씩 주고받으며 미래에 대한 약속을 나눈 것 같아 뿌듯했다.


이후 지나간 두 번의 무승부는 내게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부천전에서는 헤더를 잘 못하던 선수가 헤더로 골을 넣고, 페널티킥을 막지 못하던 골키퍼가 페널티킥을 막는 기적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다음 경기부터 선수들의 경기력이 달라졌다. 고르지 못한 경기장에 바운스된 공은 아무렇게나 튀어나갔고, 외면하는 주심 앞에서 우리 선수들은 쓰러지고 위협받았지만 이전과는 다른 투쟁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흘 후, 무조건 승리해야만 경우의 수를 따져볼 수 있는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는 다음 경기날이 되었다. 화요일 자정까지 일을 하고, 휴가를 낸 수요일에도 오전 내내 집에서 일을 하다가 경기장으로 향했다. 긴장되는 마음에 점심도 먹지 못한 빈 속이었지만 일부러 지난번 안양전 때 갔던 카페에서 같은 음료를 주문하면서 또다른 승리를 기원하는 나만의 의식을 가졌

다.


전반전에 먼저 실점을 했다. 하지만 하프타임의 락커룸에서는 변성환 감독이 선수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45분이면 충분한 시간이야”라고 말했다. 같은 시간에 서포터석에서는 서브 콜리더가 우산 돌리기 응원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서포터들을 독려했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기 위해 우산을 돌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E석과 W석에서 찍어줄테니까요. 우리는 우산을 돌립시다. N석에 왔잖아요.” 평일 경기였기에 서포터의 수는 적었지만 응원하는 소리는 처절하도록 강렬해서 찢어지게 들렸다. 서포터들은, 트리콜로는 이제 선제 실점을 당하는 순간에도 응원을 멈추기는 커녕 움찔하지도 않았다. 이기제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렸을 때, 트리콜로는 환호하면서도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며 서로를 보며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경기 종료 15초 전, 김상준 선수의 역전골이 터지자 서포터석 전체가 열광하며 경기장이 뒤흔들리도록 환호를 내질렀다. 내 눈가에 고인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누군가가 내 팔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동료들과 부둥켜안고 울었던 순간이 지나자마자 경기는 종료되었고, 우리는 경기 MVP로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김상준 선수에게 그가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응원가 ‘바모 밀료나료’를 힘껏 불러주었다.


변성환 감독은 첫 패배 이후, 시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승점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잠시 ‘현명한 선택’을 하며 자신의 방향성을 내려놓았지만, 이날 경기 전 인터뷰에서 결국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 타협이었다'라고 고백했다. 그가 지켜낸 신념은 ‘우리가 해야지’라는 말과 공명하며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냈다.


"저번에 안양전 하고 나서 내가 도취되지 말고 잘 준비하자 했는데, 솔직히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선수들이 준비하는 과정을 봤고, 했는데,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어." 언제나처럼 김현 선수의 말은 담담하지만 상당한 무게를 품고 있었다. "선수들에게 부탁 한 번 하고 싶은 게, 다 버리고 승격에만 진짜 몰두했음 좋겠어. 그렇게 하고 나서 결과를 한 번 만들어보자." 승리했음에도 바로 다음에 집중하며 팀을 위한 절실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양형모 선수가 그 뒤를 이었다. "오늘 만들었던 기회처럼 또 한 번 기회를 만들자, 우리가.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것 같아."


경기가 종료되고 선수단이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이종성 선수가 앞으로 나서서 서포터석 가까이 왔다. 김상준 선수의 역전골을 도운 그는 유니폼을 벗어 서포터석으로 던졌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단단히 매고 있었던 벚꽃 머플러를 풀어 그에게 던졌다. 꽃샘추위 속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간신히 구매했었던 한정판이었기에, 언젠가 수원의 승격이 결정되는 날에 던지겠다고 계획했었던 머플러였다. 하지만 역전골을 만들어낸 선수들을 보며 동료들과 울어버렸던 그 소중한 순간에 나는 망설임 없이 머플러를 선물했다. 그 머플러를 소중히 두르고 돌아서는 이종성 선수의 뒷모습을 보며 간절히 바랐다. 이 모든 흔들림을 딛고 오늘처럼 수원의 꽃이 피어나기를, 그리고 그렇게 피어난 꽃으로 가득 찬 꽃길 위의 우리에겐 승리뿐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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