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에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뮤지컬 < 레베카 >를 관람하였다. 옥주현의 '레베카 ACT 2'는 너무도 유명해서 뮤덕이 되기 전에도 참 많이 들었던 곡이라 익숙했고, 무엇보다도 관극 전에 원작을 읽었다. 내용을 모두 안 다음에 보는 작품이라 혹시나 지루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 역시 기우였다. 오히려 원작에서와 같은 듯 다른 점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1. 옥주현의 댄버스 부인
난 느낄 수 있어 날 불러 자신을 되살리라고
역시 '옥댄'은 옥댄이었다.'새 안주인 미세스 드 윈터'에서, 앞서 노래하던 앙상블들의 목소리보다 더 쩌렁쩌렁한 성량을 자랑하는 댄버스 부인의 첫 등장은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서의 본 공연이 종료된 후 EMK에서 신영숙 배우님 버전의 '새 안주인 미세스 드 윈터'를 박제해줘서 그 버전이 더 익숙했는데, 신댄의 '도대체'는 카리스마라면 옥댄의 '도대체'는 위압감 자체였다. (꼭 영상을 찾아보길 바란다) 전혀 다른 느낌이다. 신영숙 배우님의 댄버스 부인은 영상으로만 접했기에 말을 얹는 게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신댄은 매서운 경고로 듣는 사람을 심적으로 쪼그라들게 하는 느낌이었다면 옥주현 배우님은 말 안 듣는 놈 앞뒤 안 가리고 줘 패는 느낌이랄까.... 먼저 < 레베카 >를 보았던 친구가 신영숙 배우님의 노래는 칼로 써는 느낌이고, 옥주현 배우님은 몽둥이로 두드려 패는 느낌이었다는 감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레베카 나의 레베카 어서 돌아와 여기 맨덜리로
옥주현 배우님은 현재 JTBC에서 방영하고 있는 < 팬텀싱어 3 >에서 심사위원으로 출연 중이다. 첫방 때 '레베카 ACT 2 '를부른 조환지 배우님의 무대 심사평을 할 때, 본인이 그 곡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덕분에 '레베카 ACT 2'의 진짜 매력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광기에 차 있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불러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더 미쳐가는 댄버스 부인이 눈에 보였다. 자주 듣는 곡이었지만, 한 소절 한 소절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광기 연기를 디벨롭시켜나가는 배우님의 디테일은 역시 무대에서 표정 연기까지 다 봐야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레베카 ACT 1'과 'ACT 2'는 멜로디도 가사도, 그리고 부르는 배우도 모두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속에서 'ACT 1'을 부르는 댄버스와 'ACT 2'를 부르는 댄버스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선자에서는 레베카를 그리워 하다 못해 드디어 미치기 시작한 듯한 사람이었고, ACT 2에서는 미치다 못해 레베카의 혼이라도 씌인 듯 완전히 거기에 사로잡혀 버린 인간 같았다고 할까.
하지만, '레베카 ACT 2'가 가장 유명한 씬이라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사실 이 극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그 곡이다. 극강의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넘버 제목도, 거기에 대한 감상도 많이 언급할 수 없지만,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그 곡이 무슨 곡인지 알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작을 읽어 결말을 다 알고 관람했음에도 단전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올라온 그 미친 소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듯 싶다.
2. 이지혜 배우의 '나', 엄기준 배우의 '막심'
파멸극 레베카의 단비 같은 존재가 세 사람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이 극의 주인공인 '나('이히'라 칭하겠다)'였다. 이지혜 배우님이 이히의 귀여움을 너무 잘 살렸다. 이히는 따뜻하고 착하며 여리다. 그리고 스스로를 초라하다 여겨 끊임없이 레베카의 존재를 향해 섀도우 복싱을 하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극 내내 이름 한 번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는 1인칭 대명사로만 점철되는 것도 이런 이히의 낮은 자존감을 반영한 설정이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원작에서의 이히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레베카의 굴레와 막심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계속해서 괴로워하고 갈등을 겪는 모습들이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의 이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천진난만한 면모가 좀 더 부각되었던 것 같다. 이 극이 음산한 파멸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원작보다 조금 더 가볍게 이히를 해석했다는 점이 관객들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숨돌릴 틈을 주기에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댄버스와 이히가 형성하는 케미(?)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전부터 옥주현 배우와 이지혜 배우가 엄청난 베스트 프렌드라는 걸 알고 봐서 그런지, 댄버스와 이히가 적대적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케미가 너무 좋아 보였다. 보통 현입이 되면 캐입에 방해가 되는 게 보통인데, 오히려 현입이 캐입에 도움이 된 것 같달까 ㅋㅋㅋㅋㅋ
특히 댄버스를 두려워만 하던 이히가 각성하고 레베카의 방을 치워버리며 댄버스와 대립할 땐, 그 커다란 존재감의 댄버스가 하찮아 보일 지경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레베카가 인생의 전부였기에 레베카를 흔드는 순간 그 자신도 흔들려 버리는 댄버스 부인의 모습과, 극 내내 그에게 끌려만 다니다 처음으로 제 의견과 주관을 적극 피력하는, 보다 당당해진 '나'의 모습이 서로를 돋보이게 만드는 그들만의 디테일한 케미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듀엣에 있어서도 보이스 컬러가 완전 다름에도 불구하고 음색 합이 아주 좋았다. 워낙 옥주현 배우님의 성량이 사기적이라 음원이나 영상에서처럼 '레베카 ACT 2'에서 이히의 성량이 묻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냥 카메라와 음향 장비가 목소리를 다 담아내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이지혜 배우님의 목소리가 곱고 예쁘면서도 단단한 파워가 있어서, 볼륨은 작을 지언정 결코 묻히거나 꿀리지 않았다.
막심은 사실 원작에선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었다. 물론 이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공식 설정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리고 순진한 여자와 결혼한 후 아내를 자꾸만 가르치려 든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 속된 말로 꼰대.... 하지만 뮤지컬에서의 막심 드 윈터는 훨씬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히를 귀여워 하면서도 아내로서 그를 동등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태도가 좋았다. 원작의 젠틀함을 유지하면서 거기에 유머러스한 면모까지 추가하니, 이히와 막심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원작보다 많이 생략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원작보다 더 두 사람의 사랑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런 막심의 캐해석이 엄기준 배우님의 연기 톤과도 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대사를 칠 때 말이 좀 빨랐다는 점. 매체 연기라면 딱 자연스러웠을 톤이지만, 광주문화예술회관 특유의 구린 음향 때문에 딕션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듣기가 조금 어려워서, 그거 하나가 정말 아쉬웠다.
4. 여자들의 힘
주요 인물 외에도 눈에 계속 들어왔던 건 베아트리체 역할의 류수화 배우님과 반 호퍼 부인 역할의 최혁주 배우님이었다. 가볍고 위트 있으면서도, 동생 부부를 생각하는 애틋하고 따뜻한 속정을 가진 베아트리체를 류수화 배우님이 너무 잘 연기해주셨다. 그리고 2막 중후반부에서 이히와 함께 부르는 '여자들만의 힘'이라는 넘버가 정말 좋았다.
반 호퍼 부인은 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남 까 내리고 무시하는 푼수떼기 자의식 과잉녀가 왜 그렇게 보는 이들의 광대를 승천하게 하는지.... 실제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면 너무 싫을 타입임에도 관객의 입장에서는 정말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반 호퍼 부인이 부르는 'I'm American Woman'은 내가 본 모든 극들의 넘버 중 단언컨대 제일 신나는 넘버였다. 왜 박지연 배우가 이 넘버를 '신난다'는 아주 간단명료한 이유로 최애 넘버로 꼽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5. 극과 음악
아주 재밌는 스릴러다. 꽤나 흥미로운 반전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반전이 주는 스릴을 객석에서 느끼고 싶다면 원작을 읽지 않고 보는 걸 추천한다. 하지만 원작을 읽은 입장에서 보아도 원작보다 더 속도감 있는 전개 덕분에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었다.
음악은 예쁘고 아름다운 선율부터 웅장하고 스산한 느낌까지 그 스펙트럼이 아주 크다. '레베카 ACT 2'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다른 곡들은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는데, 상기한 '여자들만의 힘'이나 '새 안주인 미세스 드 윈터', '영원한 생명', '행복을 병속에 담는 법', 'I'm American Woman' 등 주옥 같은 넘버들이 많다. 하지만 광주문화예술회관의 음향이 별로 좋지 않은데 오케스트라가 아닌 MR을 틀어야 하는 공연장의 여러 사정 때문에 가사 전달이 잘 되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은 곡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게 다소 아쉬웠다.
연기, 노래 등 공연 자체는 좋았지만 관극 자체로는 최악이었던 공연이었다. 일단 자리가 좋지 않았다. 원래 자리 욕심도 별로 없고, 오페라 글라스가 있으니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2층에서도 꽤 뒷자리를 잡았는데 알고 보니 시야제한석이었다. 계단 위 무대 상단부가 아예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댄버스가 처음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씬인데 댄버스가 안 보였을 때의 그 참담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화가 나는 건 관크였다!!!! 웬만한 관크는 다 참고 넘기는 홍익인간인 내가 처음으로 화가 나서 1막 중간에 탈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안 그래도 자리 때문에 안 보여서 짜증나 죽겠는데 앞 줄에 앉은 관객들이 등받이에 등을 대지 않고 앉는 건 물론이고 공연 중간에 아예 허리를 숙이질 않나, 갑자기 팔을 들어 머리를 찰랑거리며 묶질 않나, 옆에선 소리내서 육성을 떠들질 않나..... 그리고 1막 시작하고 한 20분쯤 되었을 때 지연 입장을 해서는 거의 5분 내내 후레쉬를 켜고 자리 찾는다고 돌아다니질 않나.... 이래저래 관극할 때 이렇게 많은 방해를 받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의 관극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전엔 다 1층 5열, 1층 1열이라는 꿀 자리에 앉아서 관크를 당한 적이 없었다. 문화예술회관 측에서 공연장 내 정숙만 안내할 것이 아니라 착석 방법이나 지연 입장에 있어서 더 상세한 안내가 제공해주고, 관객들도 기본적인 공연 매너를 잘 숙지하고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