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 취업을 해봅시다.
고민 끝에 취업을 하기로 했다. 단단한 내실이 필요하다. 언젠가 다시 '내 일'을 벌일 때 정말 멋있게 해내려면 스스로 믿고 기댈 수 있는 진짜 실력과 자신감이 너무나 절실하다. 일 할 이유는 단단해졌고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단 욕망은 훨씬 구체적이고 뜨거워졌으니 이제 함께 성장해갈 수 있는 회사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스물셋 때와는 다른 자기소개서를 쓴다.
스물셋에 처음 썼던 자기소개서가 생생히 기억난다. 기업들이 원하는 대답을 유추해가며, 정유사에는 나의 삶이 얼마나 본 사로 인해 풍요로워왔는지 구구절절 나열했고 소비재 회사에는 본 사의 제품에 관한 추억을 언급하며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별 것 없는 지원동기와, 존재하지 않는 비전과 작정 등을 감추고 포장하기 위한 그야말로 '자기 소설'이었다.
나와 친구들이 신입사원으로 취업하고 일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됐다. 대기업과 공기업들은 의외로 욕심도 작정도 대단한 슈퍼 인재보다 동글동글 조직에 잘 융화될 수 있는 '적절하고 평범한' 사람을 원한다는 것을. (그것이 나의 신입 공채 합격 비결이 아니었을까.) 기업은 그런 역할을 요구했다. 옷차림새도 기안서도 퍼포먼스도 튀지 않게 적절히 해내길 원했다. 배경에 잘 흡수되는 보호색 같은 사람을,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눈치 빠른 사람을 좋아했다.
하지만 몇 년간 몸담고 지켜본 스타트업 세계는 다른 곳이었다. 스타트업의 채용페이지를 봐도 여러모로 차이가 느껴진다. 큰 본체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시스템에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모나지 않은 사람을 선호했던 대기업-공기업의 신입 공채와는 달리, 빠르게 변하고 성장하는 스타트업에서는 한 명, 한 명의 역할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해당 직무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높은 퍼포먼스를 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래서 대부분이 경력직 공고이다. 대학이나 스펙이 좋은 사람보다는 경험 많고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자기 목소리를 확실히 낼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회사가 원하는 경력, 경험, 자격요건, 인간상까지도 훨씬 구체적으로 나열되고 과제 전형이 있는 곳도 많다.
나는 어떤 곳에서 딱 맞는 퍼즐이 되어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달라진 상황 속에서 달라진 마음가짐을 안고 서른에 다시 자기소개서를 쓴다.
며칠간 채용 중인 회사와 포지션들을 살펴보며 지원할 곳을 추리고 추려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자기소개서를 만들었다. 오랜만에 나를 소개하려니 퍽 낯설고 멋쩍은 작업이었다.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정말 이래도 돼?'라고 묻는다. 포토샵으로 디자인을 했고, 사진은 꽃놀이 갔을 때 찍은 웃고 있는 사진을 골랐다. 학력은 뺐다. 경력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노란색을 넣어 꾸몄고 능력치는 작은 그래프로 형상화했다. 더 구체적인 포트폴리오는 PPT 파일로 별도로 만들었다.
귀가 보이게 찍은 검은 정장의 증명사진이 아닌 데다, 학력도 학점도 토익점수도 없는 노란색 컬러로 디자인을 넣은 비전형적 형식의 이력서가 그에게는 문화충격이란다. '나도 꼰댄가..'라며 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나도 내가 이런 이력서를 만들게 될 줄 몰랐다고 얘기하며 웃었다. 우리는 정말 다른 세계 속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형식을 넘어 무엇보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일단 자기소개서가 더이상 FAKE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러 기업들에 영혼없이 이름만 바꿔 지원하는 돌려쓰기도 당연히 없다. 나와 회사가 함께 성장하며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리를 고르고 골라 신중하게 쓴다.
쓸 말이 없어 형용사로 치장할 수밖에 없던 예전과는 달리 구체적인 경험들이 나열된다. 혹, 회사가 요구하는 자격요건에 맞지 않거나 해당 직무를 실행할 때 당장 부족함이 있다 느껴지는 부분은 솔직하게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배워 잘 해낼 수 있음을 소명하면서.
- 페이스북 마케팅을 진행하며 소비자의 페르소나에 대한 가설군을 분류해 캠페인을 진행했고 cpc를 4배까지 감소시킨 성과가 있습니다.
- 창업 경험으로 예산과 숫자를 읽는데 익숙하고 비즈니스와 고객군을 이해하며 주도적으로 전략을 수립해나갈 수 있습니다.
- 자체 웹솔루션에 내장된 툴을 사용했기 때문에, GA 같은 트랙킹 툴을 사용해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페이스북 ads와 네이버 광고를 2년간 직접 운영하며 데이터가 주는 인사이트를 분석했기 때문에 트랙킹 툴 사용에는 금방 익숙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자기소개서의 필수 단어. 열정이 대단하다던가, 오픈마인디드 퍼슨이라던가 하는 식의 기업 인재상에 맞는(맞을 거라 추리하는) 묘사들은 정말이지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과 성과가 나를 표현하고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성장을 이루고 싶은지, 나의 어떤 부분이 회사에 도움이 될 것인지, 왜 귀사에 지원하는지까지 구구절절 진심으로 채워 썼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지원자로 보일까?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지원완료 버튼을 눌렀다.
다양한 일을 하는 회사들을 살펴보며 어디에서 일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과정은 꽤 기대감과 에너지를 충전시켰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 길고 치열했던 창업 시절이 단 몇 줄의 경력으로 치환되는 게 참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따흑..) 하지만 그 속에서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넘쳐나니 나도 그새 한 뼘 자란 거겠지. 한 줄 한 줄 정리해 꼭꼭 써넣으니, 내 생각도 시간도 정리되는 느낌이다. 취업을 하기로 한 결심이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이왕이면 아직 작고, 성장 중인 혹은 성장 가능성이 많이 열린 곳에 가서 훨훨 내 능력을 펼쳐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월급은 여전히 소박하겠지만 훨씬 더 값진 것을 많이 가져올 수 있을거다. 정말 잘 해낼 예정이다.
물론, '내 자리 한 자리는 어딘가에 있겠지..?', '아무 곳에서도 날 원하지 않으면 어쩌지.' 싶은 걱정이 스물스물 올라올때도 있지만 그런 걱정은 모든 취준생의 숙명일테니. 감내하며 한 곳 한 곳, 신중하게 써가기로 한다.
이상, 치열한 고민을 거쳐 백수(라 읽고 창업 준비중)에서 취업준비생으로 모드 체인지를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