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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Jun 04. 2024

숨을 곳을 찾아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휴대폰 속 다이어리에 계획이 가득하다. 급하지 않다고 계속 미루기만 하는 오래된 일정도 많다. 계획을 옮길 때마다 하다 만 숙제처럼 마음 한편이 찝찝해진다. 드디어 숙제 하나를 해치우기로 마음먹는다. 바로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일. 다이어리에 적어둔 지도 4~5년이 흘렀다. 우아한 죽음은 내가 바라는 오래된 미래 중 하나다.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 에필로그이기를 기원해 왔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실천할 때가 된 것이다.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찾은 건물이 허름하고 초라하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오래되고 거대한 상가가 위태로워 보였다. 건물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건물이야말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좁고 기다란 통로를 가득 메운 더운 공기가 답답했다. 깊숙한 곳에 숨겨진 기관은 바로 부산 웰다잉 문화연구소.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곳에 직원이라고는 단 한 명뿐이다. 의향서를 작성하러 왔다고 하자 서랍 속에서 주섬주섬 서명지를 꺼낸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설명을 한 뒤 사인을 하라고 한다. 몇 주 뒤에 카드가 도착할 테니 받으면 된단다. 4~5년을 미룬 일정치고는 너무 단순해 허망했다. 우아한 죽음을 예약하는 일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몇 주 뒤 엄마를 만나 산책을 하면서 죽음을 꺼내 들었다. 넌지시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를 아냐고 묻자, 벌써 몇 년 전에 서명했다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엄마는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가볍게 내뱉곤 했다. 늙은이들은 다른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하루빨리 죽어야 한다는 말을 버릇처럼 꺼냈다. 그 말을 노인네들이 하는 가벼운 농담으로 흘려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입술 주름이 그 어느 때보다 메말라 보였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저자 패트릭 브링리는 형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겪는다. 유명한 직장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경비직으로 취직한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들은 주로 죽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그는 새로운 직업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술관에 있는 가장 슬픈 그림으로 베르나르도 다디의 <십자가에 못 받힌 예수>를 꼽는다. 그림은 예수의 죽음 아래 남겨진 슬픔으로 둘러싸여 있다. 죽은 아들을 슬퍼하는 마리아, 그를 위로하는 요한의 모습이 처연하다. 작가는 분명 그림 속에서 형을 잃은 자신의 아픔과 어머니의 고통을 직면했을 테다.

  작가는 10년 만에 미술관을 떠난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꼽는다. 그런데 작가가 다르다. 이번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에는 베르나르도 다디의 그림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죽은 예수 주변을 수많은 구경꾼이 에워싸고 있다. 호기심에 가득한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전혀 딴 곳을 쳐다보며 죽음 따위에는 관심을 거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작가는 바로 이 장면을 ‘삶’이라고 일컫는다. 갑자기 찾아온 슬픔은 우리 삶의 한 가운데를 차지한다. 그러나 분명 슬픔을 내버려두고 나아가야 할 ‘삶’이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그림 구석 한편에 슬픔에 겨워 쓰러진 마리아를 연민하는 사람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상실과 고통으로 생긴 구멍을 메우기란 쉽지 않다. 패트릭 브링리의 구멍을 메운 건 다름 아닌 사람과 예술이었다. 경계심을 지닌 채 멀리했던 경비원들과 격의 없이 친해지고, 생면부지의 관람객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긴 정적의 시간에는 침묵으로 작품과 대화하며 형과의 추억을 끝없이 되새김질한다. 그의 말처럼 ‘위대한 그림은 경외감, 사랑, 그리고 고통 같은 잠들어 있던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테다. 그는 그 순간마다 자신의 감정을 승화하고 응축하여 자신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분명 슬픔의 조각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작가는 죽음을 향한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의 태도를 대비한다. 이집트인들은 ‘제트’라고 불리는 신성한 시간관념을 따랐다. 신들의 시간이자 망자의 시간이며, 완전하고 영원한 것들이 지배하는 시간에서 존재는 무한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누군가를 형상화한 사물 또한 신성한 영역에 도달하려면 완전무결해야 했다. 그의 말대로 ‘이집트 조각이 빛내는 기묘한 아름다움은 이런 예술을 창작하려는 장대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조각상은 영원한 존재였다. 죽어서도 살아갈 영혼을 담는 그릇.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시도가 추악하고 실패했으며, 죽음이라는 근원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라고 일갈한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달랐다. 그들의 장례식에는 성직자가 배석하지 않았다. 불멸의 신들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등을 돌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장례식은 ‘보살피는 행위’였다. 사랑하는 가족을 씻기고 보듬어 떠나보내는 의식인 것이다. 그리스의 지하 세계는 흐릿하고 명확한 정체가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아는 것은 죽음이 아닌 분명 삶이었을 것이다.

   패트릭 브링리에게는 어느덧 아이가 생기고, 아이와 함께할 자질구레한 일상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미술관을 그만둘 무렵 그에겐 가끔씩 떠오르는 슬픔과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책임감이 교차하듯 번갈아 나타난다. 그는 어느덧 ’바깥세상과 다양한 관계를 맺기 위해 더 강인하고 용감한 방법을 배우고 싶다‘는 희망을 가진다. 드디어 과거의 죽음이 아닌 앞으로의 삶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그렇게 뉴욕의 여행 가이드가 되기로 하고, 해진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미술관 밖을 나선다.


  책을 읽은 뒤에도 나는 여전히 상실의 구멍을 메울 방법을 찾지 못해 서성거린다. 당신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어디로 숨어버려야 하나. 오랫동안 헤맬 내 미래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고통과 아픔이 응축되어 나만의 예술 작품이 만들어질 때까지 나는 얼마나 긴 슬픔에 빠져 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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