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5)

서문

by 최형주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1819년 작가가 30세에 출판한 책이다. 그 후 철학, 과학, 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음악가 바그너, 소설가 톨스토이 등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밀리의 서재에서 2021년 2월에 등록된 책 목록에서 이 책을 보았을 때 낯이 익었던 것은, 아마도 여러 문학작품 속에서 이 책에 대한 언급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전자책은 다양한 장점이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장점은 책의 두께를 모르기 때문에 페이지 수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실제 페이지 수는 760페이지인데, 만약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책을 실제로 읽기 전에,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서문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독자에게 3가지를 요구한다. 하나씩 그 요구가 무엇인지, 요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1. 책을 두 번 읽을 것.

이 책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각 부분은 전체에 의해 지지되는 동시에 전체를 지탱하며,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부분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한 번 끝까지 읽어서 이해한 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 이 책을 읽기 전에 서론을 읽을 것.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서문이며, 서론은 따로 있다. 근데 그것은 이 책에 들어있지 않다. 무려 760페이지나 되는 책이라 여기다가 서론을 넣기는 힘들었나 보다. 그 서론은 바로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인, ‘충분 근거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하나의 철학 논문’이라고 한다. 이 책도 약 200페이지가량되는 머리가 아파오는 철학책이다. 이 책에서는 어떤 사물, 상태의 변화를 가져오는 객관적인 이유인 ‘원인’과 행동이나 주장의 근거가 되는 주관적인 이유인 ‘인식 이유’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책 제목에 나오는 것처럼 네 가지의 ‘충족 이유율(=충분 근거율)’에 대해서 설명한다. 충분 근거율이란, 모든 것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쇼펜하우어는 생성, 인식, 존재, 행위의 충분 근거율로 구분한다. 이 논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독자가 그 논문을 통해 충분 근거율이란 무엇이고 무슨 뜻인지, 그것의 타당성이 어디까지 미치고 어디까지 미치지 않는지를 완벽하게 인식해야만, 또 그 원리가 모든 사물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는 단지 그 원리의 결과라는 것을, 다시 말해 그 원리에 따른 필연적 귀결인 셈임을, 오히려 어떤 종류의 객관이든 주관이 인식하는 개체인 한, 그것은 항시 주관에 의해 조건 지어진 객관이 어디서나 인식될 때의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독자가 완벽하게 인식해야만, 내가 이 책에서 맨 처음 시도하는,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적 사유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 글의 의미를 ‘표상’에 대해 다룰 다음 글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일단은 넘어가자.

3. 칸트 철학에 대해 이해할 것.

“2천 년 전부터 철학에 나타난 것 중 가장 중요하고도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현상”이라고 칸트 철학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은 칸트 철학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칸트의 물자체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서는 따로 챕터가 있을 만큼 중요하게 다룬다. 특히 칸트에 대해서는 이 책 760페이지 중 마지막 160페이지 정도를 할애한 <칸트 철학 비판>이라는 부록이 있을 정도다. 또한 추가로 [우파니샤드]나 [베다]에 대해 알고 있다면 최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어 보였는지 이런 말도 한다.

책 하나를 읽는 데에 그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대체 어떻게 끝까지 책을 읽어 낼 수 있겠느냐고 독자가 분격하며 반문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비난에 맞서 일일이 대응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렇기에 앞에서 언급한 요구들을 이행하지 않으면 죽 읽어 나가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 책을 읽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내가 때맞춰 주의를 준 것에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고마워하길 바랄 따름이다. 특히 이 책은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어서 많은 기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것이므로, 비상한 사유 방식을 지녀 이 책을 향유할 능력이 있는 소수의 사람을 차분하고 겸허히 기다려야 한다.
머리말까지만 읽고 그만둔 독자는 현금을 주고 이 책을 샀으므로 무엇으로 자신의 손해를 배상할 건지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제 나의 마지막 도피처는 책이란 읽지 않아도 여러모로 이용할 수 있다고 그에게 일러 주는 것이다. 다른 많은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장서의 빈 곳을 메워 줄 것이고, 장정이 훌륭하면 확실히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또는 박식한 여자 친구가 있는 자라면 그녀의 화장대 위나 차 마시는 탁자 위에 놓아두어도 좋을 것이다. 또는 마지막으로 분명 가장 좋은 용도이고 내가 특히 권하는 것은 이 책을 비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설적이라 비난받고 진부한 것이라 무시당하는 앞뒤의 장구한 두 기간 사이에서 진리가 누리는 축제의 기간이란 너무나 짧을 뿐이다. 또한 이 진리를 주창한 장본인도 마찬가지로 역설적인 운명을 맞곤 한다. 하지만 인생은 짧지만, 진리는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며 오래 살아남는다. 그러니 우리 진리를 논하기로 하자.

오만하고 도발적인 문장이다. 거기다 마지막의 농담까지.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 책을 편 나와 같은 입장에서는, 이러한 서문을 읽고 난 후에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서 저자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저자가 말한 세 가지 조건을 완벽히 갖추지도 못했기에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고 이해한 것을 요약하여 최대한 알기 쉽게 글을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