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이 책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따라서 이 글은
1.‘표상’이 무엇인가
2.‘왜’ 세계는 나의 표상인가
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이다.
다행히도 표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역주가 달려 있다.
“표상: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표상’이란 오감,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의해 인지되는 대상을 말한다. 의지와 표상의 관계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실, 칸트의 사물 자체와 현상, 우파니샤드 철학의 브라마와 마야의 관계와 같다.”
일단 뒤의 문장은 제치고, 앞의 문장만 보자. 즉 표상은 오감에 의해 인지되는 대상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 “세계는 나의 오감에 의해 인지되는 대상이다”
표상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왜’ 세계가 나의 표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세계는 그냥 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인데, 내 감각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지? 저자 또한 이에 대해서 시원하게 풀어서 설명해주지 않는다. 일단 책을 더 읽어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유물론으로 사실 물질을 사유한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물질을 표상하는 주관, 물질을 보는 눈, 물질을 느끼는 손, 물질을 인식하는 지성을 사유했을 뿐이었음을 단번에 깨닫게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객관적인 물질 그 자체가 우리 외부에 존재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감각을 통해 외부에 대해 간접적으로 느낄 뿐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플라톤과 칸트가 상세히 서술하였다. 따라서 앞서 서론에서 저자가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에 대해 알아야 된다고 말한 것이다. 76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서 160페이지를 할애해 [칸트 철학 비판]이라는 특별 부록을 실었을 정도이며 본문에서도 <31. 플라톤의 이데아와 칸트의 사물 자체>라는 챕터가 존재한다. 심지어 특별 부록인 [칸트 철학 비판]을 먼저 읽는 게 좋다,라고 서문에서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본문에서 칸트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칸트가 말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시간, 공간 및 인과성은 우리의 인식 형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 자체의 규정이 아니라 그 현상에 속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모든 다수성, 모든 생성 소멸은 시간, 공간 및 인과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그 결과 그것들 또한 결코 사물 자체가 아닌 현상에만 부수된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은 시간, 공간 및 인과성이란 여러 형식에 의해 조건 지어지기 때문에, 전체 경험은 단지 현상의 인식일 뿐 사물 자체의 인식은 아니다. 따라서 인식의 여러 법칙 또한 사물 자체에 효력을 미칠 수 없다. 앞서 말한 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에도 해당되는 것이며, 우리는 자신의 자아조차 현상으로서만 인식할 뿐 자아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것에 따라 인식하지는 않는다.”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이해를 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경험 또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에 의해 조건 지어지기 때문에 사물 자체에 대한 인식은 아니다. 이 같은 결론은 자신의 자아를 인식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시 이 글의 목적으로 돌아가자. ‘왜’ 세계는 표상인가? 그것은 우리가 세계라는 객관 자체에 대해 이해할 수 없으며 감각으로만 인식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는 나의 오감에 의해 인지되는 대상, 즉 표상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알고 다시 본문의 첫 챕터를 읽어보자.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그렇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으며, 인간이 실제로 이를 의식할 때 인간의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겨난다. 그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어떤 진리를 선험적(a priori)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 진리는 온갖 다른 형식인 시간, 공간 및 인과성보다 더 보편적인 경험,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가능한 경험의 형식을 말하고 있고, 이 형식들은 이미 바로 이 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충분근거율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인식한 이 모든 형식은 각각 표상들의 특수한 부류로 간주되는 반면,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는 것은 그러한 모든 부류의 공통된 형식이고, 그러한 형식 아래에서만 어떤 종류의 표상이든, 추상적이든 직각(直覺)적이든, 순수하든 경험적이든 어떤 표상이 가능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진리보다 더 확실하고, 다른 모든 진리와 무관하며 증명을 덜 필요로 하는 것은 없다. 인식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전체 세계는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객관에 지나지 않으며, 직관하는 자의 직관, 한마디로 말해 표상인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아주 먼 것과 가까운 것에도 적용된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그 속에서만 구별되는 시간과 공간 자체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세계에 속하고 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불가피하게 이처럼 주관에 의해 조건 지어진 상태에 있으며, 주관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세계는 표상이다.
“세계는 표상이다.”라는 명제와 함께 우리는 표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세계가 표상인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표상이란 감각에 의해 인지되는 대상이다. 우리는 객관 그 자체를 알 수 없고 감각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객관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는 곧 표상이다.
이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자연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에서 다루는 모든 대상은 모두 근본적인 것이 아닌 간접적인 표상이다.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는 도달할 수 없으며, 표상과 표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으로 끝날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로 나아갈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그 실마리로 ‘신체’에 대해 말한다. 이에 대해서 다음 챕터에서 다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