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3/5)

신체

by 최형주

<이전 글의 결론 및 예고>

“세계는 표상이다.”라는 명제와 함께 우리는 표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세계가 표상인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표상이란 감각에 의해 인지되는 대상이다. 우리는 객관 그 자체를 알 수 없고 감각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객관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는 곧 표상이다.


이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자연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에서 다루는 모든 대상은 모두 근본적인 것이 아닌 간접적인 표상이다.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는 도달할 수 없으며, 표상과 표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으로 끝날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로 나아갈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그 실마리로 ‘신체’에 대해 말한다. 이에 대해서 다음 챕터에서 다뤄보자.


<서문>과 <표상> 다음 소제목은 <의지>이다. 예고에서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이해로 나아가기 위한 실마리인 신체”에 대해 다뤄 본다고 말했는데, 왜 소제목을 <의지>로 정하였는가에 대해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먼저, 왜 ‘신체’ 인가? 쇼펜하우어는 신체에서 어떤 특이점을 발견했는가? 먼저 아래의 인용을 읽어보자.

신체와 그 주관의 동일성에 의해 개체로서 나타나는 인식 작용의 주관에 이 신체는 아주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진다. 첫째로 지성적인 직관 속의 표상으로서, 여러 객관 중의 객관으로서, 그리고 이들 객관의 법칙에 종속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즉 의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누구에게나 직접 알려진 것으로서 주어진다. 그의 의지의 모든 참된 행동은 즉각 필연적으로 그의 신체 운동이기도 하다. 그가 실제로 행동을 하려는 경우 그것이 동시에 신체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 의지 행위와 신체 행위는 인과성의 끈으로 결합되고 객관적으로 인식된 두 개의 상이한 상태가 아니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전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져 있을 따름이다. 하나는 전적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다른 하나는 지성에 대해 직관 속에 주어진다. 신체의 행위는 객관화된, 즉 직관 속에 나타난 의지 행위와 다름없다.

신체는 다른 표상들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내 의지 행위와 신체 행위가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오른팔을 들겠다고 생각하면 오른팔이 실제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나의 내적 의식과 이 신체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톱니바퀴와 같이 물리적인, 혹은 신경 신호와 같은 화학적인 작용으로 인해 그렇게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객관인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내적 의식과는 관련이 없다. 내 내적 의식, 즉 의지와 신체 행위는 전혀 상이한 두 가지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난다. 어떠한 것을 매개로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는가?

이러한 문제는 슈펜하우어가 처음 발견한 문제는 아니다. 만물을 두 가지로, 즉 물질과 정신으로 분류하는 이원론이 나타나면서 함께 나타난 문제다. 정신계와 물질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아야 하는데, 어떻게 내 정신이 명령하는 대로 신체가 움직이는가? 이에 대한 해답 중 하나로 휠링크스가 제시한 <두 시계 이론> 이 있다. 한 시계(신체)와 다른 시계(정신)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두 시계는 정교하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같은 순간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이 시계를 정교하게 조정한 사람은 바로 신이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일은 결정되어 있으며,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신체의 행위는 객관화된, 즉 직관 속에 나타난 의지 행위와 다름없다.” 신이나 혹은 다른 매개로 신체와 의지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 바로 신체라는 것, 즉 “신체=의지”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우리는 신체를 실마리로 삼아, 신체가 곧 의지라는 쇼펜하우어의 논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책의 제목을 보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수식으로 나타내면 “세계=의지=표상”이다. 세계가 표상이라는 것은 앞의 글에서 다루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아직 신체=의지라는 결론밖에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지 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읽어 보자.

그런데 내가 충분히 입증했고 납득되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 사물 자체가 의지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의지의 현상과 분리된 채 고찰되어 시간과 공간의 밖에 위치하게 되고, 따라서 다수성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다. 그렇지만 이미 말했듯이, 개체나 개념처럼 하나라는 것은 아니고, 다수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개체화의 원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으로 하나다. 모두 의지의 객관성인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사물의 다수성은 그 때문에 의지와는 관계없고, 의지는 사물의 다수성에도 불구하고 분할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돌 속에는 의지의 보다 작은 부분이 있고, 인간에게는 보다 큰 부분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오로지 공간에 속하며, 이 직관 형식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많고 적음도 현상, 즉 가시성이나 객관화와만 관계할 뿐이다. 이 객관화의 정도는 돌보다 식물에서 더 높고, 식물보다 동물에서 더 높다. 그러니까 의지가 나타나서 가시적으로 되고, 객관화되는 것에는 가장 약한 여명과 가장 밝은 햇빛 사이처럼, 가장 강한 음과 가장 약한 여음(餘音) 사이처럼 실로 무한한 등급이 있다. 우리는 나중에 의지의 객관화와 의지의 본질을 모사하는 것에 필요한 이 가시성의 정도에 대한 고찰로 되돌아갈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표상의 형식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많고 적음, 부분과 전체, 밝고 어두움 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의지의 성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의지는 하나다, 라는 말 또한 어폐가 있다. ‘하나’라는 것 또한 시간과 공간이 전제되어 있는 표상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성질이기 때문이며,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의지의 객관화인 사물에서의 차이는, 그저 의지가 얼마나 객관화가 되어있는지, 즉 ‘객관화의 정도’만 다를 뿐이다. 즉, 신체를 비롯한 세계는 모두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객관화의 정도를 나누어 두었다. 의지의 객관화의 가장 낮은 단계로 중력이나 전자기력 등의 ‘자연력’을 예로 든다.

결론 및 예고

“세계=표상”이라는 것을 이전 글에서 알아보았고, “세계=의지”라는 것을 이번 글에서 알아보았다. 책의 제목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므로, 이 책을 다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76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나머지는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가? 이 책에서 “왜” 세계가 표상인지와 의지인지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책의 대부분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것을 받아들인 후의 과정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1부는 표상, 2부는 의지에 대해서 다룬다. 그렇다면 3부와 4부는 무엇인가?

3부는 예술에 대해서 다룬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과학에 포함되는 모든 학문으로는 표상, 표상과 표상 사이의 관계, 현상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뒤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 의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바로 예술이다. 다음 글에서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예술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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