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에의 의지
쇼펜하우어는 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언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삶의 꽃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표상으로서의 세계 전체가 의지의 가시성에 불과하다면 예술은 이 가시성의 명확화이고, 대상들을 더 순수하게 보여 주고 보다 잘 개관하며 통합시키는 요지경(Camera obscura)이며, 극 중의 극이고, 『햄릿』에서 무대 위의 무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은 오직 고독한 천재, 예술가에게만 가능하다. 이처럼 예술을 높게 평가하는 그의 철학은 당대와 후대의 다양한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는 표상이며, 의지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을 통해 의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여기까지가 4 부 중 3부에 대한 내용이다. 4부에서는 이러한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계가 표상이며 의지이며, 예술이야 말로 훌륭한 것임을 알게 된 사람. 이런 사람은 어떤 자기 인식에 도달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어떤 고뇌를 하고 어떤 행위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부가 표상, 2부가 의지, 3부가 예술에 대해 다루었다면 4부는 윤리에 대해 다룬다.
이 길고 긴 책의 (부록을 제외한) 마지막 파트에서는,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게 된 인간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는 무조건적 당위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철학자가 해야 할 것, 철학의 본질은 인간의 행위를 고찰하는 것이지,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쇼펜하우어의 논리구조를 하나하나 알아보자.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며, 단순한 자연력부터 복잡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현상은 모두 의지의 객관화라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현상은 의지의 객관화일 뿐이다. 또한 모든 결과는 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다. 모든 현상의 원인은 의지이므로, 따라서 모든 결과는 예정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의 행위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성격은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있고 주어져있으며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후천적인 노력과 경험에 의해 자신의 성격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욕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다.
세계의 본질인 의지는 최종 목표가 결여되어 있다. 의지의 객관화인 물질 또한 순간적인 목표를 향해 노력하지만 최종 목표가 없기에 그 노력은 저지될 수만 있을 뿐 성취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지의 가장 완전한 객관화인 인간은 가장 결핍된 존재다. 수많은 소망과 욕구를 해소하더라도 새로운 소망과 욕구가 다시 나타나며,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무료함이 뒤따른다. 이렇게 한계로 인해 인간은 언제나 고뇌한다. 인간이 행복을 느낄 때는 오직 소망과 충족의 무한한 굴레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게 유지될 때뿐이다. 이렇듯 행복은 언제나 고통이나 부족에서의 구원이며, 소극적이다. 진정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에 대한 예술 작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고뇌를 추방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고뇌의 형태를 바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고뇌의 형태는 원래 부족과 곤궁, 삶의 유지를 위한 근심이다. 극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이 형태를 지닌 고통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고통은 연령이나 사정에 따라 교대로 수많은 다른 모습을 취하며 성 욕동, 열정적인 사랑, 질투, 부러움, 증오, 불안, 명예욕, 금전욕, 질병 등으로 나타난다. 고통이 결국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없게 되면 싫증과 무료함이라는 슬픈 회색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것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가지를 시도한다. 마침내 이 싫증과 무료함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 이전의 여러 고통 중 하나에 다시 빠져 고통스러운 춤을 처음부터 다시 추게 될 것이다. 모든 인생은 고통과 무료함 사이에 이리저리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생은 수난의 역사라는 인식에서 인류에 대한 고찰이 출발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몇 가지 단계로 나눈다. 물론 쇼펜하우어가 1단계 2단계라고 나누어둔 것은 아니며, 칼로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해보았다.
-1단계-
대부분의 인간은 여기에 해당된다. 욕망하고, 고통받고, 고뇌하는 무한한 굴레에 빠져 있다. 자신의 의지만 인정하고 타인의 의지는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탐내고, 기껏해야 자신의 내세의 안정을 위해 기부하고, 도둑질하고 살인까지 일삼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을 외부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하고 보잘것없게 흘러가는지, 안에서 갖는 느낌으로도 얼마나 막연하고 정신없이 흘러가는지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들의 삶은 빛바랜 동경이자 괴로움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생각을 품고 인생의 사계(四季)를 거치며 죽음을 향해 꿈결처럼 허우적거리며 걸어간다. 이들은 태엽이 감기고는 왜 그런지 알지도 못하고 가는 시계의 태엽 장치와 같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는 것인데, 이는 이미 수없이 연주된 손풍금 곡을 악절마다 소절마다 보잘것없게 변주하여 거듭 되풀이하기 위해서다.
-2단계-
이 단계의 사람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현상의 본질은 의지라는 개체화의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해 자신의 의지뿐만 아니라 다른 개체의 의지 또한 긍정한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각자의 권리와 소유물을 존중하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다른 개체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3단계-
이 단계의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개체화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남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별이 줄어든다. 자신에게 여분의 음식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 음식이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따라서 남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금욕과 궁핍까지 감수한다. 자신이라는 현상과 타인이라는 현상이 모두 의지의 객관화라는 것을 인식하고 체득한다. 최고 수준까지 나아가면 다른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안녕과 삶을 파괴하는 자비와 고결한 마음에 도달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인(聖人)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의 눈앞에 마야의 베일, 즉 개체화의 원리가 확연히 드러나서, 그가 자신과 남을 더 이상 이기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다른 개체의 고뇌에 자신의 고뇌처럼 커다란 관심을 가지며, 그럼으로써 언제라도 남을 도울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할 수 있을 때 기꺼이 그 자신을 희생할 용의가 있다면, 그 결과 자연히 모든 존재 중 자신을, 자신의 가장 내적이고 참된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은 모든 생물의 무한한 고뇌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전 세계의 고통도 분명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 어떤 고뇌도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보고도 좀처럼 덜어 줄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모든 고민, 그가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고민, 그러니까 그가 단지 가능하다고만 인식하는 모든 고민은 그 자신의 고민처럼 그의 정신에 작용한다. 아직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과는 달리 그는 변전하는 자신의 안녕과 슬픔을 더 이상 안중에 두지 않고, 개체화의 원리를 간파하고 있으므로 모든 것이 그에게 똑같이 가깝게 생각된다. … 이기주의자에게는 그 자신만이 친근한 것처럼, 그에게는 이제 이 모든 것이 매우 친근하다.
-4단계-
일반적인 사람도 때로는 고뇌를 인식하고 삶의 덧없음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다시 부귀영화나 편안함, 희망, 향유 등의 현상에 의해 현혹되어 다시 삶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개체화의 원리를 궁극적으로 간파한 사람은 그런 현상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고통이 모두 의지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행위에서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행위에서 위안을 얻지 못하고, 고통의 원인인 의지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이것이 ‘덕에서 금욕으로의 이행’이다. 삶의 달콤함을 느끼지 않도록 끊임없이 금욕하고, 모든 종류의 의욕을 억압한다. 의지의 확실한 가시성인 자신의 신체까지도 금욕시킨다. 그 끝은 평범한 죽음이 아닌 무(無)다. 불교의 해탈과 유사하다. (이는 자살과는 다르다. 자살자는 자신이 삶을 의욕함에도 불구하고 삶의 여러 조건에 만족하지 못할 뿐이며, 자살은 전적으로 무익하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그는 끊임없는 결핍과 고뇌를 통해 자신과 세계의 고통스러운 현존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혐오하는 의지를 점점 더 꺾고 죽이기 위해, 단식하고, 그러니까 금욕하고 고행을 한다. 결국 그 의지의 이 현상을 해소하는 죽음이 오고, 이 경우 그 자신을 거리낌 없이 부정함으로써 이 신체에 활기를 주는 것으로 현상했던 미약한 잔재에 이르기까지 의지의` 본질이 이미 오래전에 사멸해 버린다면, 죽음은 고대하던 구원으로서 대환영을 받고 기꺼이 받아들여진다. 이 경우 죽음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 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현상만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현상 속에서만 또 현상에 의해서만 미약한 현존을 가졌던 본질 자체가 없어져, 이제 가는 마지막 끈마저 끊어지고 만다. 이렇게 끝나는 사람에게는 세계도 동시에 끝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길고 긴 책의 마지막 챕터의 이름을 <71. 무(無)에의 의지와 세계>로 지었다. 이 챕터에서는 “당신이 생각한 인간의 최종적인 목적지가 고작 헛된 무(無)라는 말이냐?”라는 예상되는 독자의 비난에 대해 답한다. 그러면서 무無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무가 무엇인가? 무언가 있는 것이 유고 없는 것이 무라면,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반대쪽에서 보면 무가 아닌 유다. 절대적인 무란 없다. 상대적이거나 부정적인 무일뿐이다. 우리는 의지가 무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슬퍼할 필요는 없다. 개체화의 원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통해 우리가 무가 된다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의지의 객관화인 한 그 상태, 무는 우리에게 인식되기 매우 어려워 그에 대해 잘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예술이 알려주는 내적 진리들과 성자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 무에 대해 소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성자들은 고요한 마음, 깊은 평정, 확신과 명량함을 지니고 있다. 그 상태에 도달한, 무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우리와 같이 실재적인 세계가 무이다.
우리는 오히려 의지가 완전히 없어진 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의지로 충만한 모든 사람에게는 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의지가 방향을 돌려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그토록 실재적인 이 세계는 모든 태양이나 은하수와 더불어 무(無)인 것이다.
이것으로 이 책이 끝이 났다. 지금까지 여러 개의 포스팅을 통해 이 책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정리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이 책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몇몇 철학책들은 단순히 정보에 그치지 않는다. 단순히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정보라면 일반 현대인들이 수백 년 전의 최고의 철학자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인터넷에는 그 수만 배의 정보가 존재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단순한 정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한 인간이 세상과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는 투쟁의 기록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론과 논리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전보다 정리된 책을 보는 것이 낫다. 그럼에도 원전을 읽어보아야 저자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고 그 치열함에 대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요약정리 포스팅도 내가 책을 읽고 난 후 내 멋대로 요약한 것뿐이다. 만약 이 책을 읽고 관심이나 의문이 들었다면, 원전을 읽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