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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주 Oct 07. 2023

여행 준비의 철학

<주간 여행 에세이> - 6

 2023년 10월부터 6개월 간 세계여행을 갈 계획입니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멕시코시티에 가는 것을 시작으로 중남미 쿠바를 비롯해 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을 거쳐 유럽, 터키, 아시아 등지를 돌아볼 예정입니다. 이 여행기간 동안 여행 기록을 남기고 여행에 대한 잡다한 글, 그러니까 여행 에세이를 쓰려고 합니다. 부담이 없으면 결과가 나오지 않기에 스스로에게 미션을 부과했습니다. 어느 나사 빠진 신문사에서 나에게 여행 소재의 주간 칼럼을 의뢰했다는 생각으로, 매주 한국시간 토요일 오후 9시에 한 편씩 업로드해보려 합니다.


적어도 6개월의 장기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만큼 가기 전 준비할 것들이 많다. 특히 이번 여행은 집 계약을 종료하고 한국에 거점을 남겨두지 않은 채 떠나는 여행이다. 짐을 최소한으로 정리하여 아주 필수적인 것들을 모아 따로 보관하고 필요 없는 것들은 버려야 한다. 평소에는 생각 없이 지속하고 있던 넷플릭스 같은 OTT 구독 서비스나 인터넷, 전화 요금 같은 구독 서비스도 모두 종료를 하거나 최소한도로 교체해야 한다. 다양한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결제를 해야 하기에, 그 상황에서 필요한 몇 개의 카드만 남기고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색한 일이다. 계속해서 소비하고 축적하는 데 익숙해진 현대인에게는. 그 어색함에서 한 발 나아가 정리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은 사실 나에게 별 필요가 없던 물건이구나. 이런 것들은 중요하고, 저런 것들은 없어도 괜찮네. 이것은 없으면 불편하니까 어떻게든 남기고, 저것은 없으면 조금 불편해질 수 있지만 큰일 아니니까 이번 기회에 없애버리자, …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나와 주변 사물과의 관계에 대해 불가피하게 알게 된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충동적으로 소비하고는 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옷이나 기기 같은 실물뿐만 아니라 인터넷이나 구독 서비스 같은 무형의 소비재에 대한 소비도 마찬가지로 다시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소비도 잘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집이 깔끔해지고 홀가분해지는 것은 물론 좋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나와 주변 사물과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점도 훌륭하다. 그렇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시선이 분산되거나 신경이 쓰일 만한 물건들이 없어지고 꼭 필요한 것들만 제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주 사용하는 스킬만 퀵슬롯에 올려놓게 된다. 필요 없는 간섭들을 줄이고 꼭 하고 싶은 것들로 내 시공간을 채울 수 있다. 여행을 갔다 와서 주거지를 새로 만들 때도 하나하나 생각을 하고 공간을 꾸미고자 한다.

 장기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앞서 말한 주변 정리와 정반대의 행위도 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필요 없는 물건들을 사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진행해야 한다. 여권을 만들고 (군복무가 끝나서 10년짜리 여권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비자와 같은 출입국 서류를 준비하고 (미국을 경유해 멕시코로 입국하기 때문에 이스타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여행자 보험도 알아봐야 한다. (물품 분실이나 비행기 연착으로 인한 손실을 보상해 준다) 황열병이나 장티푸스, 파상풍 등 예방접종도 맞는 것이 좋다.(입국을 위해 접종 증명서를 요구하는 나라들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나라에서 전자기기를 충전하기 위한 멀티 어댑터와 대용량 보조배터리는 필수고, 안전 지갑과 자물쇠 등도 있으면 좋다. 또한 이번 여행의 절반 이상은 스페인어권 나라이기 때문에, 듀오링고라는 앱을 이용해 간단한 스페인어도 배우는 중이다. 출입국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환전에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미리 알아보고 준비하는 것이 좋다. (물론 전부 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이러한 준비는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필요가 없기에 오로지 여행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준비들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설레게 한다. 출발을 위해 적어둔 리스트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해나가면서 여행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는 생각으로 들뜬다. 마치 MMORPG 게임에서 레이드를 입장할 때 입장권을 제작하고, 필요한 스펙을 맞추고, 동료들을 모아 파티를 꾸리는 것처럼, 지금까지 살던 환경과는 동떨어진 색다른 장소로 가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롭고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다. 여행보다 여행 준비가 더 재밌다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장기 여행을 떠나기 전 주변 정리를 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마음도 무언가 특이한 상태가 되었다. 짧게나마 (그래도 최대한 길게) 지금까지 살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의 인생을 리셋하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 된다. 주변 정리를 하며 필요한 것만 남기고, 갔다 와서 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최소한의 소비만 하다 보니 어떤 것이든 크게 집착하지 않게 된다. 여행지에 대해 알아가고 계획을 짜다 보면 내가 모든 것을 완벽히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즐기는 것뿐이라는 여유로움도 장착된다. 에리히 프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소유보다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번 여행이 끝난 후에 언제 다시 여행다운 여행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언제나 여행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마지막 여행, 지구를 떠나는 긴 여행을 준비할 때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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