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실, 수많은 선생님 앞에서 했던 <고요 속의 외침>
나는 정식 출근일이 오기 전에 몇 번 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 몇몇 교직원들을 스치듯 만났다. 전임 교무부장과 연구부장을 만나기도 했고, 차기 학년부장도 만났다. 그중 반가웠던 것은 내가 대학에서 가르쳤던 학부생을 같은 직장에서 만났던 것이었다. 사실, 내가 먼저 알아보지는 못했다. 코로나가 한참 돌던 시기여서 상당 부분 원격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반갑게 교수님이라며 인사를 건네준 덕에 마음이 조금은 편했고 고마웠다. 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고마운 마음은 금세 걱정으로 덮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 선생님에게 학점을 잘 주었는지, 혹시 학점을 나쁘게 줘서 악연으로 기억하면 어쩌나 하는 잡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특히 동종업계에 속한 사람을 한 명씩 만나는 일이라면 그러한 만남을 즐겼다. 그러나 그 수가 많아지면 그 자리를 즐기기 쉽지 않았다. 다수 앞에 서야 했던 수많은 경험 때문이다. 달갑지 않은 이야기를 대중 앞에서 하는 것이 얼마나 껄끄러웠던가? 연구부장으로서 선생님들에게 학교교육과정의 콘셉트를 이야기할 때나, 교사 협의체의 대표로 다른 학교의 교사들 앞에서 시책 사업을 소개하고 안내할 때, 면학 분위기가 안 되어 있는 학과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 그들의 냉랭한 표정이 내 눈에 맺힘에도 애써 중립적인 마음을 유지하며 에너지 넘치는 척 말을 이어가는 것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 중에 하나이다.
수석교사가 된 만큼, 내가 싫어하는 '나를 내켜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나와 내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수석교사 안내>라는 이름의 대면식, 그것이 처음의 사건이 되었다. 학교를 옮긴 수석교사는 새 학교에서 이미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기존의 선생님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해야만 한다. 나는 이 대면식이 내가 경험했던 여러 안 좋은 사례보다 더 나쁜 분위기에서 말하는 상황일 것임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수석이 학교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이 선생님들에게 달갑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수석교사의 장학인데, 수석교사가 배치된 학교는 거의 대부분 수업공개를 통한 장학 기능이 강화된다. 이미 내가 근무할 학교는 교장 교감이 수업을 40분 보고 나가는 상황이라, 수석이 와서 학교를 더욱 헤집고 다닐 것이라고 예상하는 선생님들이 나를 반가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수석교사가 무엇을 하고, 내가 수석교사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하는 자리가 유쾌할 리가 없을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수석교사 안내>를 발표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30분이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이 순간을 위하여 며칠간 작업을 했다. 스마트한 인상을 주기 위해 한눈에 들어오도록 슬라이드의 디자인에 신경을 쓰고, 일부 슬라이드에 포함할 효과음을 위해 음악을 직접 편집하는 등, 위트 있는 진행을 위해 십 수 시간 공을 들였다. 나를 소개하는 당일, 시청각실에 새로 전입온 선생님들과 기존 선생님들이 모였다. 거의 70명이 모인 그 자리에서, 나는 시간을 내어 수석교사제를 소개하였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시작부터 무거웠고, 그래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수석교사가 되기 전에는 훨씬 재미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학술발표도 수 차례 성공적으로 해 냈지만, 다들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냉랭한 눈빛으로 화면을 보고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나는 "지식으로 봉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선생님들의 전문성을 지원하기 위해 수석을 선택했기에, 내가 무엇을 특별히 더 도울 수 있는지 초점을 두어 설명했다. 일 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했기에, 40여 건의 표창 분야를 분석하고, 그간 집필한 서적과 연구한 논문들을 분야별로 데이터화해 제시했다. 또, 15년 중 7번의 부장을 어떻게 했는지, 지도해 온 학년 따위 등을 그래프로 나타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나는 수석교사라는 존재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동료들의 마음을 생각해서, 수석교사로서 '요청을 하시는 경우 도움을 드리겠다'는 조건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나는 수석교사로서 내 일에 대한 나의 기대를 충분히 낮췄다고 믿었다. 비록 교직 경력이 길지 않지만, 그동안 수많은 일로 여러 종류의 교사를 상대하며 갈등을 겪어봤기에 나는 제 스스로를 닳고 닳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경험상 협업을 하는 동료들에게 기대하는 만큼 실망이 컸다. 요청하는 경우 돕겠다는 말은 내가 지나치게 나서길 원치 않은 사람들과, 상처받을 나를 위한 말이었다.
그러나 되돌아보건대, 이 날 내가 뱉어낸 말들은 여전히 내가 순진하고 어리석은 기대를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내 스펙에 관심이 없고(그 스펙이 어느 정도의 경력이나 경험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자신의 전문성을 향상하기 위해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게 되기까지 두세 달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무슨 분야에 전문성이 있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전문성을 활용해 자신의 전문성을 계발하는데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 그것이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시청각실에서 만난 수많은 동료들이 별 반응이 없던 그날의 기억.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고요 속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짜 문제가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