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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키아벨리 7시간전

내가 예상한 수석교사 생활 vs 실제 수석교사 생활

요약: 대충 할 사람은 수석교사 지원 조차 하지 마라

지난 10월 19일에 있었던 수석교사회 주관 연수. 수석교사는 주말이 없다.


  가을이 무르익는 요즘, 각 시도교육청 별로 수석교사를 선발하고 있다. 교육부의 푸시(?)에 힘입어 올해는 대부분의 지역으로 선발이 확대되고 있다. 경기도 인근인 인천에서는 올해 무려 다섯 명이나 선발할 계획이란다(인천의 지인이 둘이나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몇 해간 수석교사를 선발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파격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수석교사는 다른 교사들에 비해 수업 시수가 적은 데다, 초등을 기준으로 정원 외 교사(학급수에 비례하는 교직원 수에 포함되지 않는 추가 배치교사)로 분류되기 때문에 자칫 세금 먹는 하마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수석교사의 주된 업무인 '전문성 지원'이라는 것의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것도 애매함이 있다. 수석교사와 교류를 많이 하는 교사일수록 교육전문성이 높아질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게 향상된 교육전문성을 양적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수석교사제는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수석교사와 교사의 주관적인 인식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 믿음이란 수석교사들이 열심하고 있다는 인식에 대한 믿음, 교사들이 전문성이 향상되었다고 주장할 때 실제로 공교육의 질도 향상되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엊그제 동기 수석님들을 만났는데 많은 사람으로부터 수석교사 준비에 대한 조언 요청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얼굴 한 번 못 본 (선배) 교사나 지역 내에 근무하는 교사로부터 조언을 요청받기도 했기에 공감이 들어 관심 있게 이야기를 들었다. 근데 한 수석님의 이야기가 황당했다. 전혀 모르는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수석을 하는 동기가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점은 수석교사를 하면 승진하지 않아도 정년까지 수업하면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런 조언을 한 인간이 그 학교 교감이라는 것이었다. 수석교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중고등학교 수석교사들이 그 정도 인식을 받을 정도로 똑바로 못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수석교사로서 언짢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수석교사 지망생들이 수석교사를 지원하게 된 동기가 같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수석교사와 오랜 기간 교류를 하면서 진로를 결정하거나 교감의 권유로 관심을 갖고 시험에 지원한다. 내 경우는 후자였는데, 우리 교감선생님은 '학교라는 조직에도 진지하게 공부하는 교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며 권했다. 당시에 근평 3년 받고 나서 부장 1년 정도 하면 교감 서류를 낼 수 있는 시점이어서 고민을 했지만, 좀 더 성질머리에 맞는 일을 하고자 결심하고 수석 시험을 치렀다. 나는 그런 점에서 교감이 어떤 인식을 갖고 수석교사 선발시험에 응시할 것을 제안하느냐는 수석교사 지망생의 인력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찍부터 교육청과 지원청일을 해왔는데, 한 때는 장학사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표창장과 위촉장이 80장 정도 되었는데, 그 정도 경력이면(필기 준비 능력을 빼놓고 볼 때) 그 일을 하는데 턱없는 경험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전업 연구자가 되고 싶어서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20편이 넘는 논문을 혼자 썼다(낭인 생활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 와중에도 일반승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 승진 점수를 관리해 왔다(연구대회 1등급은 두 번 받고, 각종 도 단위 가산점도 매해 꼬박꼬박 챙겼다). 그러니까, 내가 해온 일은 학교의 바깥일과 집안일 모두였다. 특히 박사학위 취득 이후에는 대학 강의나 시도교육청 이상의 일(가령 국가 수준교육과정 개발이나 각종 연구들)에 참여했다. 그냥 이 일 저 일 달려들었다. '수석교사로서 어떤 경험을 하였나?' 하며 내 이력을 묻는다면, 이러한 삶이 내 답이다.


  다른 사람들의 지적 작업에 대해 컨설팅을 하고 결과를 향상하거나, 사람들을 만나서 조율하고 조언과 재촉으로 성과를 내게 하거나, 현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고 통찰력으로 마무리하는 게 내 일이요 특기였다. 수업의 달인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지만, 내가 잘 알고 잘하는 한 과목 정도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수석교사가 뭘 하는 직위인지도 몰랐고, 실제로 같이 일해본 적이 없었다(한 번 수석 출신의 박사님과 교육부 연구를 함께 한 적은 있었지만, 연구 외에는 전혀 관계된 것이 없었다). 나는 수석교사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예상한 수석교사로서의 삶과 내가 실제로 살고 있는 수석교사로서의 삶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예상한 수석교사의 삶은 이랬다.

* 적은 수업시수를 배정받는다. 충분히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그 여유를 나의 자기 계발과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데 쓴다.

* 여유가 많으니 연구부장과 담임할 때보다 학술지 논문 쓰기 위해 시간 내기가 쉽다. 더 나은 퀄리티의 연구물이 나온다.

* 지역 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지역 내에 교과 수업과 관련한 커뮤니티를 만들어 알려주고 나누며 매일이 보람으로 충만하다.

* 교감처럼 꼴 보기 싫은 학교 구성원을 위해서 일할 필요 없이, 내가 돕고 싶은 사람만 진심으로 돕는다(많은 교감선생님들은 열정적인 선생님이든 태만한 선생님이든 모두를 업무적으로 관리하며 잘 해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커버하고 있다).

  내가 예상하는 수석교사로서의 삶은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겪어보지 않았으니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적었다.


  그에 비해 실제 수석교사의 삶은 이랬다.

* 수업 시수가 적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업 말고도 학교 안팎의 장학에 들어갔는데, 수업 참관만 90시간에 육박했다. 기본적으로 내 연구 분야를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고, 선생님들의 교육전문성을 길러주기 위해 필요한 내용을 공부하기 위해 시간을 쓴다. 시간이 모자라서 퇴근 후 저녁에 공부하기도 하고, 주말에 공부할 때도 있다.

* 연구부장과 담임교사를 하던 시절보다 훨씬 바빠서 학술지 논문은 겨우겨우 예년 양만큼 해냈다. 시간에 쫓기니 논문의 퀄리티도 그다지 좋지 않다. 올해의 경우 예년과 같이 두 편을 게재했고, 그것도 수정 후 재심까지 가는 끝에 겨우 통과되었다.

*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학교일만으로도 정말 바쁘고, 원하지 않게 다른 학교 저경력 교사들을 돕는다(근데 그 저경력 교사들 중에는 내 도움을 성가셔한다는 것은 킹 받게 하는 또 다른 포인트).

* 내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도와야 한다. 컨설팅과 지원의 범위는 학습에 적극적인 교사를 넘어선다. 건방지거나 무례한 교사들도 도와야 했다. 그 와중에 내가 진심으로 돕고 싶은 열정적인 사람도 도와야 했는데, 그 사람들이 좋은 결과를 얻게 만들기 위해서 나를 갈아 넣어야 했다.

  여기까지는 위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경험들이다. 그러나 실제 수석교사의 삶은 이것 말고도 더 많은 고난이 있었는데, 이것은 수석교사에 대한 이해 부족과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느낀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업 잘한다고 해서 수석교사로서 훌륭하게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업을 잘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수석교사제가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실제 수석교사가 학교에 잘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이것을 훨씬 초월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수업 능력보다 오히려 교육 및 학교 전반에 대한 이해와 통찰, 기획 능력이 더 중요했다. 차시 단위의 수업이나 몇 개의 연속된 차시의 수업이 나무라면, 교육 및 학교 전반에 대한 이해와 통찰, 기획 능력은 숲이다. 기본적으로 많은 학교 구성원이 수석교사를 싫어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수석교사가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와 크게 관련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에 도는 미신으로 '수업에 정답이 없다', '모든 수업은 다 훌륭하다'가 있다.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수업에 문제가 있어 변화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이 일을 하는 데 중요하지 않다. 모든 수업이 다 좋은 수업이라는 미신 속에서 수석교사가 특정 이론이나 본인의 취향에 경도된 교육 방법론을 들고 오면 그것이 타당한 것이라도 무용지물이 된다. 더군다나 어떤 수업이든 옳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만연한 데 아무리 전문가의 입장에서 좋은 수업을 매일 공개하는 식으로 보여준들, 쇠 귀에 경 읽기와 다를 바 없다. 수석교사의 잘 준비된 '파인다이닝'식의 수업을 보여준다고 해서 교사들이 뭔가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이는 두 번째 깨달음과 연결된다.


  둘째, 수석교사는 자기가 잘하는 것을 잘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생님이 잘하는 것을 더욱 잘하게 해야 한다. 앞서 거의 모든 학교 구성원이 수석교사를 싫어한다고 했다. 수석교사의 주 업무인 전문성 지원이라는 말을 비틀어보면 다수의 교사들이 결핍된 부분이 있거나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자존심 강한 교사들이 이것을 수용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교사는 수업 말고도 다른 직업적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 가령 생활지도나 학급경영, 인성교육, 사업기획, 각종 교육연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나마 이 부분에 어려움을 겪거나 더 잘하고 싶은 교사들이 '일부'있다. 다수의 교사에게 수업은 저 목록 중 하나에 해당하니, 전문성 지원의 측면에서 '수업' 하나만 본다면 수석교사를 찾아올 교사는 학교 구성원 중 극소수에 불과하다. 공문의 붙임에 들어가는 기획안을 체계적으로 쓰고 그 내용의 타당성을 높이도록 조언하는 것이나, 연구 대회 준비에 통찰을 토대로 결정적인 조언을 하는 것, 생활지도 잘할 수 있도록 효과적이고 올바른 훈육 방식을 알려주는 것 등 수석교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잘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찾아오는 사람들이 잘하는 것을 발견해 주고 지지하며 실제로 그것을 더 잘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수석교사는 (교과) 수업-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교육-제너럴리스트여야 한다. 그러니 수업만 잘한다고 해서 수석교사로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수석교사가 된 내 동기 수석님들 중 상당수가(나를 포함해서) 역량의 부족을 느끼며 허덕이고 있다. 본인의 부족한 느낌뿐만 아니라, 체력적으로도 다들 소진되어 보인다. 나의 경우는 올해 처음으로 내가 정년퇴직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본인 수업이나 학급 건사도 정년까지 할 자신이 없는 교사가 수석교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교감이 되지 못해 뭐라도 해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수석교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방면에서의 깊이 있고 폭넓은 경험과 더불어 열정적인 봉사와 헌신이 없으면 수석교사로서 제 구실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수업 안 하는 시간에 하는 외부 강의 등 돈벌이 따위에 관심을 두고 수석교사가 되겠다거나 말년에 쪽팔리기는 싫고 학교에서 대접 좀 받겠다는 생각으로 수석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수석교사를 지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수석교사가 되면 수석교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수석교사를 더 싫어하게 만들 뿐이다. 나는 헌신하는 수석님들에게 폐가 될 사람들이 수석교사로 채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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