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날을 받고서

by 구구

암 치료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항암 치료를 받으며 부스스 떨어지는 머리카락이었다. 어렵사리 긴생머리 여신(??)이 됐는데 이제 대머리 여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했다. 다행히 내 경우는 항암제가 잘 안 듣는 종양이어서 수술로 제거하기로 했다.


우리의 폐는 좌에 하나, 우에 하나가 있다. 좌폐는 좌상엽과 좌하엽,(위 아래, 위 위 아래♬) 우폐는 우상엽, 우중엽 우하엽으로 나뉜다. 나는 우중엽, 우하엽 사이에 종양이 있는 케이스다. 수술을 하면서 우중엽만 자를 수 있으면 자르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우중엽 우하엽 모두 자를지 결정한다고 했다. 폐기능 검사 결과 폐 상태가 좋은 편이라 우중엽만 자르면 폐기능이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그렇게 많이 자르는데 정말?...) 근데 우하엽까지 자르면 뭐... (이제 슬픈 말은 암환자 보호를 위해 ‘...’으로 생략하기로 한다)


의사가 요놈 제거만 하면 이제 별 일 없을 거라는 늬앙스로 말한 덕에 ‘내가 이제 죽는구나’류의 절망감은 들지 않았다. 수술 설명을 받은 마지막 외래 진료날에서부터 약 40일 뒤에야 수술날이 잡혔다. 뭐든지 빨리 해치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짜증이 나긴 했지만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구 멸망일을 내일로 잡을래, 40일 후로 미룰래?라고 물으면 누구나 유보를 할 테니까.


40일 간은 내 멋대로 살기로 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러닝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그룹 운동을 하는 곳도 한 달 끊었다. 근력치를 최고로 키우고, 최고로 몸짱이 된 후 수술을 받고 다 털려서 말라 비틀어진 낙엽이 되겠노라...고 이상한 다짐을 했다. 새벽에는 러닝을, 주 3회 그룹운동을 하면서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사실 이렇게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정신적, 금전적 여유가 된다는 증거다. 암에 걸린 건 걸린 거고, 여유가 있다는 건 좋은 거다.


사실 난 애매한 우울감이 상당하다. 우연찮게도 요 몇 달간 정신수양과 관련된 두 명의 사람과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내 상태를 알아차릴 정도였다. 그중 한 명은 도서전시회 출판사 부스에서 마주한 스님이었다. 그때는 책 구경하느라 컨디션이 상당히 좋았는데도 간파당해서 소름이 끼친 기억이 있다. (여러분, 도를 닦읍시다. 3초만에 우울한 사람을 거를 수 있어요)


여튼, 우울한데도 낙관주의자일 수 있는가? 있다! 장기가 털리게 생겼는데도 그 점에 관해 자꾸 파헤치고 피폐해지지 않았다. ‘암보험을 들어놔서 다행이다’ ‘누군가 보면 사치스럽다고 할 ‘운동’이란 것에도 돈을 쓸 수 있네‘ ’수술 전 40일이나 내 맘대로 계획을 할 수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수술 전 하루라도 불행하다면 나는 그 날은 내가 뻥 차서 날린 거다. 제일 멀쩡할 때 잘 놀고, 앞으로는 절대 못할 운동을 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이 불행에 대해 이렇게까지 담대해 질 수 있을까 고민해 봤다. 그건 바로 운명이라서. 이 불행에는 하늘과 나 그 외의 어떤 것도 개입이 되지 않았다. 사주나 손금을 보면 몇 살 때 큰 병이 날 일이 있네, 명이 짧네 하는 걸 다 맞추지 않는가. 그냥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다. 평소 날 괴롭히는 것들에는 때로는 한 사람 단위로, 사회 단위로 결국에는 타인이 개입된 경우가 대다수다. 근데 이번은 아니다. 똑같이 폐가 잘리더라도 누가 날 찌르거나 해서 생긴 일이더라면 아마 난 이미 백발마녀가 됐을 것이다. 너무나도 억울해서. 그 타인을 죽여서 들짐승 밥으로 던져버리고 싶어서. 원망할 대상이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홀가분하다. 그래서 재밌게 지냈다.


최고의 상황, 최악의 상황을 모두 상상하며 사는 사람이다. 최악의 상황이란, 첫 수술을 하고, 얼마 후 암이 전이되거나 재발하고, 항암을 하다가 몇 년 내에 고통 가득 죽는 것.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을 때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밖에 흘릴 일이 없긴 했지만 죽음에도 초연해졌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기운을 낼 텐데 그럼에도 죽음이 찾아온다면 내가 어떻게든 막을 길이 없어서. 우리 가족, 너무나도 힘들겠지만 결국에는 다들 잘 살 것 같다. 그렇게 얼렁뚱땅 결론을 냈다. 아 놔아~ 아직 살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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