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가는 광야 길을 낙원으로 그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회화들을 사조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세 방에서 이어지는 다음 전시실은 당연히 르네상스방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은 크게 피렌체 화파와 베네치아 화파로 나누어 지죠. 그래서 에르미타주에서도 이 2개의 화파를 나누어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전시실들은 대(구)에르미타주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예카테리나 여제 때인 1771~1787년에 세워졌으며, 소에르미타주보다 크기 때문에 대에르미타주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원래 전시실과 도서관으로 만들어졌으나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왕들이 묵는 방으로도 사용되었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내부는 황실의 부유함을 강조하는 듯, 준보석으로 치장한 기둥, 금도금된 넝쿨 장식 그리고 값비싼 거북이 등껍질을 벗겨 금으로 상감한 문짝들로 화려합니다.
죽 이어지는 이러한 바로크식의 화려한 복도 공간을 앙필라드라고 하는데요. 네바강에 면에 있기 때문에 네바 앙필라드라고 부릅니다. 앙필라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디자인을 본뜬 것입니다. 네바강의 풍경을 감상하며 화려한 앙필라드에서 묵는다! 이런 방에서 한번 묵어 보고 싶네요. 이 앙필라드에 나란히 이어지는 또 다른 실들은 중정을 향하여 창이 나 있으며 네바강변의 방들보다는 소박합니다. 이렇게 2개로 나뉘어진 앙필라드와 내실들에 르네상스 그림들을 배치했습니다.
과연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피렌체 화파와 베네치아 화파 중에 어떤 화파에게 화려하고 웅장한 네바 앙필라드 전시공간을 제공하였을까요? 이미 미술사적으로 답은 나와 있죠? 당연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을 보유한 피렌체 화파이겠죠. 중세방에서 왼쪽으로 가면 피렌체 화파들의 그림을, 오른쪽으로 가면 베네치아 화파들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티치아노의 그림을 더 좋아했다고 하니 베네치아 화가들의 그림을 절대로 무시해선 안되겠죠?
베네치아 화가들의 그림은 피렌체 화가들보다 밝은 것이 특징이죠. 베네치아 화파의 대표자로서는 조르조네(1478~1510)와 티치아노(1488~1576)를 들 수 있는데요. 두 화가는 조반니 벨리니(1430~1516) 공방에서 동문 수학한 사이입니다. 티치아노는 처음에는 벨리니에게 배웠지만, 조르조네에게서 혁신적인 그림을 발견하고는 조르조네를 모방하기 시작합니다. 조르조 바사리(1542~1596)에 따르면, 티치아노의 그림이 조르조네와 너무 똑같아서 사람들은 조르조네의 그림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조르조네가 요절하는 바람에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화파의 리더로 부상하게 됩니다. 에르미타주에는 이 위대한 두 베네치아 화가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에르미타주 217번 방에서 이 두 화가들의 16세기 초반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요. 조르조네의 '풍경 속 성모자'는 르네상스 미술이 드디어 베네치아에 도달했음을 알려줍니다. 즉 원근법을 그림에 잘 적용한 것이죠. 그리고 조르조네의 작품 '유디트'는 유디트 해설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여기에 티치아노의 초창기 그림 두 점이 있습니다. '경배(1508)'와 대형 캔버스인 '이집트로의 피난(1507-1508)'입니다. 이집트로의 피난은 당대 회화로서는 규모가 큰 풍경화에 해당됩니다. 그림에 나타나는 전원의 서정적 풍경은 그의 선배인 조르조네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티치아노는 미켈란젤로만큼 유명한 베네치아 화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티치아노를 화가의 왕이라고 했을 만큼 중요한 화가죠. 조반니 벨리니가 사망한 이후인 1517년부터 베네치아 공국의 공식 화가로 임명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가 렘브란트라면, 티치아노는 16세기 베네치아 공국 황금기를 빛내는 화가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백작을 하나 더 만들 순 있지만 두번째 티치아노를 찾을 순 없지"
티치아노는 여러 주제의 그림을 그렸는데 초상화를 특히 잘 그렸어요. 그 시대의 교황, 황제, 공후, 귀족들이 앞다투어 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곤 했죠. 바사리는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에서 티치아노의 인생에 대해 기술할 때, 이집트로의 피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 후 그는 지금 산 마르쿠올라에 사는 안드레아 로레다노의 저택 홀에 실물대 크기로 그림을 그렸다. 즉 이집트로 가는 성모 마리아인데, 배경은 우거진 숲과 여러 전원 풍경이다. 같은 집에 살던, 풍경화에 능숙한 독일인 화가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수개월간 이런 화풍을 익힌 것이다. 숲속에는 실물에서 사생한 여러 동물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조르조 바사리 저, 이근배 역, 한길 그레이트북스 p.3103
여기서 독일인 화가는 티치아노에게 고용된 자로서, 티치아노 작품의 풍경을 도맡아 그린 화가였습니다. 티치아노가 다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용된 화가들이 부분 부분을 맡아서 그려주었기 때문이었어요. 당연하겠지만, 이 그림에서도 자연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주제와 상관없이 자연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르조네의 영향입니다.
그림의 주제는 르네상스 이후로 성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집트로의 피난'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 왕은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만나러 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불러 왕을 찾거든 자신도 경배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계시에 의하여 '아기'로 오신 왕을 만나 경배하였지만, 천사의 지시를 따라 헤롯에게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귀향하였습니다. 한편 예수의 현세의 아버지인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이집트로 피난하라 일러줍니다. 이에 요셉은 바로 일어나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트로 탈출하게 됩니다.
어떤 외경에서는 예수의 사촌인 야고보도 성가족과 동행했다고 나오는데요. 이 그림에서 당나귀를 끄는 사람은 아마도 야고보인 것 같습니다. 작가는 성경의 주인공들을 일상의 모습처럼 묘사했습니다. 아기를 낳은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요셉의 말을 따라서 새벽 같이 일어나 이동하느라 무척 피곤한 성모 마리아. 얼굴을 엄마 품에 파묻은 아기 예수는 가난한 집의 처지를 보여주듯 천으로 동여맸습니다. 씩씩한 야고보는 열심히 나귀를 끌며 다른 손에 보따리 장수처럼 물건을 챙겼습니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늙은 요셉은 힘겨운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큰 캔버스를 통해 화가는 피난처라는 위급한 상황을 탁트인 자연 속의 파노라마로 그려냈습니다.
중세 화가들이 복음서를 묘사한 방식을 떠올려 보세요. 성탄, 성모희보, 성모자, 막달라 마리아 등 어떤 성화에서도 예수 수난의 생애를 암시하곤 합니다. 티치아노의 이 그림도 예수 수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가로로 길게 뻗은 캔버스에는 꽃이 만발한 초원과 잎이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그늘진 푸른 산과 들판에, 사파리인 듯 수많은 동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가 이집트로 가는 길은 이렇게 우거진 숲일 수 없습니다. 지형적으로 베들레헴이 포함된 이스라엘 남부에서 이집트로 이어지는 길은 광야 지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티치아노가 묘사한 자연은 이집트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어떤 지방을 배경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비현실적인 묘사를 택했을까요? 그것은 따뜻한 햇빛이 스며든 자연 속에 동물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록 성가족이 헤롯 일당에게 쫓기는 입장이더라도 이들의 신변은 안전할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