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콜리니코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그리보예도바 운하 73번지에 소냐 마르멜라도바가 살았다. 몸 파는 여자의 집이 주거단지 속에 있다는 사실은, 자기 집에서 이런 일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은 시대이며, 매춘이 일상에 가까웠음을 말해 준다. 소냐는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와 폐병으로 요양이 필요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 파는 일에 뛰어들었다. 오늘날 그녀의 집은 찾기가 쉽지 않다. 소냐가 살던 정확한 집 주소는 죄와 벌에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 연구자들에 따르면 소설 내에 예카테리나 운하(도스토옙스키 당시에 그리보예도바 운하가 이렇게 불림)에 있던 카젠나야 팔라타 건물이 묘사되어 있어 그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소설 속 중요한 조연이지만 오늘 투어에서 아직 언급하지 않은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잠깐 소개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두냐를 가정교사로 고용한 적이 있다. 그는 아내가 있는 상태에서 두냐를 흠모하여 그녀를 추근대었다. 두냐는 일을 그만 두고, 오빠를 만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왔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아내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은 후,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냐를 찾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올라 왔다. 그리고 하필 소냐의 옆집에 머문다.
그러고 보면 죄와 벌의 무대는 그리 넓지 않다. 센나야 광장과 굽이굽이 흐르는 그리보예도바 운하 주변의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대부분 20-2번 버스가 지나가는 쌍문동 주변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다. 이 넓지 않은 공간에서 1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마치 13년 동안 일어나야 할 것을 압축해 놓은 양, 많은 사연들이 있고 사람들도 죽어 나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에는 죽음의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온다. 인생사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일까? 아마도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젊은 나이에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수없이 경험한 때문일 수도 있다. 비극의 두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도 그런 슬픈 인생사 속에 있다. 그들도 불행한 사건의 일부가 되어 비극으로 끝나고 말 것인가!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불쌍한 사람들이 만나서 이루는 불행한 이야기로 끝내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소생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다만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 괴롭다. 선을 넘은 두 사람이 새로 태어나는 이야기는 둘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밤 11시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의 집으로 간다. 소냐는 재봉사 카페르나우모프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다. 카페르나움은 성경의 가버나움을 말한다. 가버나움에 살던 일곱귀신 들린 여자, 예수에게 고침받은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창녀였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소냐의 원형을 막달라 마리아에서 찾은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만난 뒤, 예수의 제자가 되고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만나는 인물이다. 창녀이지만 예수의 어록에 의하여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 막달라 마리아! 소냐도 창녀로 나오지만 죄와 벌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남았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기 몸을 굽혀 엎드리더니 소냐의 발에 키스한다.
"난, 당신에게 절한 것이 아니오, 나는 온 인류의 고통에 절한 것이오!"
'온 인류의 고통'에서 우리는 예수를 떠올릴 수 있다. 성경 누가복음 7장에는 가버나움에 사는 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입맞추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개 이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죄와 벌과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다만, 소설의 상황은 거꾸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키스를 하였다. 즉, 이 장면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로 인한 고통을 감당한 자는 소냐로 설정된 것이다.
대화 중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가 리자베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당신은 헌옷 장수 리자베타를 알았나요?"
"네... 당신도 그 여자를 아시나요?"
"리자베타와 친한 사이였소?"
"네 정직한 여자였어요. 우리는 함께 성경을 읽고... 그녀는 하나님을 만나 뵐 거에요."
라스콜리니코프는 깨닫기 시작한다. 자신이 행한 것은 정의가 아니고 범죄였음을...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다. 동시에 그녀의 착한 여동생 리자베타도 죽였다. 그는 아직도 노파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하지만, 리자베타는?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전당포 노파는 사회악으로서 제거의 대상이 된다 쳐도, 리자베타는 순진한 영혼일 뿐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런 착한 인간들을 위해 거사를 행한 것인데 그 불쌍한 사람을 죽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아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주인공의 성 라스콜리니코프는 라스콜 раскол(분열)과 니코프 ников(~ 하는 사람)의 결합이다. 분열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실 이 명칭은 분리파 정교도를 지칭하는 것인데,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주인공의 성으로 쓰고 있다. 주인공의 성 자체에서 이미 그는 세상에서 분열된 존재라는 암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소냐에게 요한복음의 '나사로 부활' 대목을 읽어 달라고 거의 명령조로 부탁한다. 아마도 살인했다는 현실을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부활'을 떠올린 것 같다. 소냐는 급작스런 라스콜리니코프의 태도에 놀라 울면서 복음서를 겨우 읽어 내려 간다. 다 듣고 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말한다.
"만약 내가 내일 오게 되면, 누가 리자베따를 죽였는지 당신에게 말해 주겠어!"
내일 오게 되면... 이는 내일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아는 분열되었다. 결단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되돌아 왔을까? 돌아 왔다. 그는 노파를 죽인 것이 자신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죠? 그녀는 절망적으로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에 달려들어 그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그럼, 나를 버리지 않는 거야, 소냐?”
“아니오, 아니예요. 절대로 언제까지나, 그 어느 곳에서도 버리지 않을 거에요! 오 하나님. 오 나는 불행한 여자야. 왜, 왜 난 당신을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왜 당신은 좀 더 일찍 오지 않았어요? 오 하나님!"
요즘 영화에서는 어떤 인물이 사이코패스 살인자임이 밝혀지면 그 자리에서 그것을 안 사람도 죽임을 당하는데, 죄와 벌에서는 오히려 사이코패스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만약 소냐가 여기서 죽음을 당한다면 죄와 벌은 호러물로 전락할 뻔했다. 그랬다면 인류의 고전으로 남지 못했을 거고.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센나야 광장으로 가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노파를 죽였다고 자백하라고 권유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민하며 소냐의 집을 떠난다.
이 둘의 대화를 옆방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엿듣고 있다. 그는 이 약점을 가지고, 흠모해 왔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두냐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두냐가 회유와 겁박에 넘어가지 않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크게 상심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 밤에 소냐를 찾아 가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로디온에게는 2가지 길이 있소. 머리에 총구를 겨누거나, 블라디미르카로 가는 것이오."
블라디미르카는 중죄인들의 시베리아 형무소 가는 길을 말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라스콜리니코프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예견하는 것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라스콜리니코프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사실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높은 지위를 갖고 부자가 되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 말이다. 하지만 이를 이룬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로와 한다. 즉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라스콜리니코프에 대한 예고는 자신에 대한 고백인 셈이다. 만약 비극적 소설이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살로 소설을 마무리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결론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역할을 스비드리가일로프에 맡긴 것 아닐까? 그 두 사람은 폭우가 쏟아지는 그날 밤에 똑 같이 네바강변을 해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라스콜리니코프는 경찰서에 자수하여 블라디미르카를 선택하게 된다.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말을 맺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인간은 죄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을 작가는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