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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하다 Dec 13. 2022

왈츠는 계속된다

꿈을 멈추지 말아요

"우리도 따뜻한 실내에서 챔버 뮤직 감상하고 싶었는데."


동해 바다에서 다이빙을 즐겁게 마치고 돌아온 두 남자가 예술의 전당에서 실내악 공연을 보고 온 두 여인에게 귀여운 투정을 부렸다. 남편이 1박 2일 자리를 비운 시간을 채워 준 고마운 동생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클래식 공연을 즐겼다. 연주자들의 세세한 표정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일이라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는 것에도 집중할 수 있어 더 감각이 풍부한 시간이었다.


다시 모인 커플들은 조잘조잘 떨어져 있던 시간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이 우리도 클래식을 듣겠다며 유튜브로 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재생시켰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우린 모두 대화를 멈추고 TV를 바라보게 되었다. 공간의 배경음악 정도로 두고 대화를 이어가기엔 음악이 심히 좋아서였다.


"어머, 뭐예요? 왈츠, 너무 좋은데요?"


TV를 등지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돌아 앉은 동생이 물었다. 공연장 객석에 앉아 있는 할리우드 배우 앤서니 홉킨스와 아내의 모습이 계속 화면에 보였다. 앤서니 홉킨스가 작곡한 곡인데 곡 이름이 [And the Walts Goes ON]이라고 남편이 말해주었다. 5분 여의 곡이 흐르는 동안 대배우의 삶이 흐르는 것 같아서 넋을 잃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앤서니 홉킨스의 아내를 보며 내 감정도 일렁이면서,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존경이 차올랐다.


나는 그들의 사연이 궁금해져서 앤서니 홉킨스와 왈츠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곡은 앤서니 홉킨스가 1964년, 27세에 작곡한 곡이었다. 그는 사실 배우가 되기 전에 음악가였는데, 2012년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평생 작곡을 해왔고, 충분히 똑똑했다면 음악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배우에 만족해야 했다'라고 표현할 만큼 음악에 대한 경외심과 꿈이 큰 사람이었다. 우리가 본 영상은 2011년 7월, 그가 왈츠를 작곡한 지 47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곡을 보고 들은 날의 모습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만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앙드레 류를 TV쇼에서 본 앤서니 홉킨스는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초연을 하던 날 앙드레 류는 "지난 몇 년 동안 본인이 작곡한 왈츠를 연주해 달라는 '팬'이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연락을 너무 많이 받았지만, 이번에는 팬의 이름을 듣고 기절할 뻔했다"라고 말했다. 악보를 보내달라고 했고, 곡을 받아본 후 앙드레 류는 왈츠를 극찬했다. 대단하고, 매혹적이고, 로맨틱하고, 영화 같다며 모든 아름다운 단어를 나열한 끝에, 그는 이 곡을 연주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대화를 멈추고 빨려들만큼 음악이 좋아서 당연히 대배우의 삶의 연륜이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는데, 27살의 청년이 종이에 적어 내려가고 한 번도 귀로 듣지 못한 곡이었다니. 실력이 부족해서 음악가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시절의 기록이지만 이렇게나 마음을 울릴 수 있다니. 내가 화면을 쳐다본 것은 누군가 "앤서니 홉킨스가 작곡한 곡이야"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곡이 너무 좋아서였는데.


여든이 넘은 앤서니 홉킨스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영상이 유튜브 곳곳에 많았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평안했다. 피아노와 가깝고 친근하게 지내온 세월이 그의 손가락에 담겨있다. 왈츠에 관한 인터뷰를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노년의 배우는 50년이 지난 그날을 기억한다고 했다. 인터뷰어가

"1964년이었나요?"라고 묻자 "1964년 11월 7일이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앤서니 홉킨스보다 훨씬 젊은 인터뷰어는 너무나 오래 지난 그날의 정확한 날짜를 말하는 대배우가 신기해 웃음 지었다. 그날이 생각나냐고 물었더니 그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설명했다.


"대기실에서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었어요. 어둡고 조금 우울한 날이었고, 춥고 비 오는 날이었습니다."


왈츠가 초연되던 날의 영상을 다시 보았다. 언젠가 배우는 철이 들면 연기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었다. 철이 없다는 건, 무지하거나 예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었다. 폭발적인 감정의 드러냄도, 대단한 절제도 모두 표현의 방식인데 그 어떤 것도 너무 많은 생각과 시선에 갇혀버리면 어려워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순수와 낭만을 잃지 않아야만 대사 없이 눈으로 말하는 순간에 진짜를 담을 수 있다.


공연을 바라보는 대배우의 얼굴에 27세 청년의 눈빛이 보인다. 비 내리던 11월 7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악보에 음표를 적어 내려 가던 앤서니. 오랜 시간 소중하게 간직해온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이 온 얼굴에 번지는 행복으로 보는 사람들을 더 벅차게 만든다.

연주가 끝나고 작곡가인 앤서니 홉킨스에게 인사하는 앙드레 류의 손짓에 관객들이 환호하며 기립 박수를 보낸다. 노년의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상기된 얼굴로 연신 "Thank you"를 반복하며 벅찬 감정을 어쩌지 못한다.


왈츠가 연주되는 동안 그의 곁에는 눈물 흘리는 아내가 있었다. 오래된 꿈을 응원해주고 그 소중함을 알아주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베스트 댓글에 감성쟁이 울보는 오늘 아침도 눈물을 터뜨렸다.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점은 그의 아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녀가 그로 인해 얼마나 행복한지."


내 꿈을 응원해주는 소중한 이가 곁에 있다. 앞으로 수십 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철들지 않고, 하루하루 소중하게 기록하고 간직하며 보낼 힘을 대선배님께 충전받은 감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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