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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순 Dec 07. 2023

월급 도둑의 퇴근 후 사정

베이징덕





큰일 났다. 일이 없다. 성질머리 급하게 한꺼번에 몰려든 프로젝트들의 마감은 역시나 한꺼번에 몰려왔고, 그렇게 일이 뚝 끊긴 채로 12월에 접어들고 말았다. 한창 일이 바쁠 때는 얼른 좀 한가해졌으면을 그렇게 외쳐대었는데, 막상 일이 뚝 끊기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월급 도둑이 말이 쉽지, 뭔가 대놓고 놀기도 눈치 보이는 사무실에 꼬박 여덟 시간,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한 고역이다.

회사에서의 무료함은 퇴근 이후로도 이어진다. 하루종일 격무에 시달린 날이야 집에 가면 몸도 뇌도 뚝 멈춰 세워 놓고 그저 쉬고 싶은 마음뿐이라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요즘 같아서는 퇴근 이후에라도 뭔가 재밌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박 수준으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퇴근 후 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이 딱히 뭐가 있으랴.  거창한 취미를 시작하기에는 언제 또다시 일이 쏟아져 들어올지 모른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뭔가를 배우고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할 자신이 없을뿐더러, 애초에 크게 흥미가 생길 만한 일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맛있는 거나 먹어야겠다. 오늘 하루 종일 따분하게 흘려보낸 시간까지 차곡하게 메꾸려면, 그냥 맛있는 거 말고 좀 더 스페셜한 게 필요해. 그렇게 우리는 북경오리 집을 향했다.


카빙 전,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베이징덕


북경오리(베이징덕)는 오리의  몸통과 껍질 사이에 바람을 불어넣어 빵빵한 공기층을 만든 후, 오랜 시간 건조한 뒤 구워낸 음식이다. 이렇게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오리는 한 마리 통째로 먼저 손님상에 올라 그 자태를 뽐낸 후, 먹기 좋게 손질되어 다시 내어진다. 바삭바삭하면서도 기름진 그 껍질과 살코기는 그대로 먹거나 밀전병에 싸서 먹고, 살이 많지 않은 기타 부위로는 탕을 끓여 식사의 마무리로 삼는다. 왕실 연회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음식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엔터테인먼트로 가득 찬 음식이 아닐 수 없다.


사전 주문이 필수인 베이징덕을 주문한 건 이 날 우리 테이블뿐이었다.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북경오리가 서브되자 딤섬이나 우육면 등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던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꽂혔다. 덩달아 나까지 뭔가 무대 위로 불려 나오는 느낌이었다.


베이징덕의 껍질 부분. 파작파작 식감이 좋고 고소하다.
살코기는 그냥 먹어도 좋고 밀전병에 싸먹어도 좋고.



잠시간의 포토 타임 후, 먼저 껍질 부분부터 손질되어 나왔다. 빠짝빠짝 잘 건조된 껍질에 황설탕 콕 찍어 입안으로 넣어보면, 파삭 입안에서 부서지며 잔뜩 머금고 있던 고소한 기름이 기분 좋게 퍼진다. 아기 피부처럼 보드라운 밀전병 위에 안쪽 담백한 살코기 한점 얹고, 실파에 고수까지 얹어주면 식감도 맛도 다채로운 한 쌈이 완성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농후하게 응축된 오리의 비옥한 풍미는 점점 식사에 가속도를 붙게 한다.

그렇게 게눈 감추듯 접시를 비워가고 있자면, 남은 고기를 어떻게 조리해서 먹고 싶은지 의견을 물어봐주신다. 날이 추우니 고민할 필요 없이 탕으로 결정. 하늘하늘한 배춧잎까지 넣고 끓인 뽀얀 탕은 뼈에서부터 우러난 깊은 맛이 고루 밴 것이 짜릿짜릿했다. 한 바탕 벌인 신명 나는 잔치에 걸맞은 피날레다.

살코기 등을 발라내고 남은 부위를 맑은 탕으로 끓여냈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캄캄해진 거리에는 연말을 맞아 다양한 빛 장식들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일루미네이션을 구경할 겸 귀갓길은 조금만 빙 돌아가기로 했다. 든든한 식사 덕인지 올 때 보다 몸이 녹아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혀 끝에 선연한 오리 껍질의 바작거림, 밀전병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식감의 탑,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 시야로 뛰어드는 알록달록 전구의 불빛들. 월급 도둑은 영 성격에 맞지 않아 내일도 분명 하루 종일 꽤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만, 오늘 별인 잔치의  작은 반짝임들로 무사히 채워 보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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