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誕生은 내 커다란 失手 중의 최초의 것이었다
실수, 앨범 속에서 발견한 38년 전의 글
어젯밤은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무언가 제대로 책도 볼 수가 없어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는지 밤 11시가 넘자 ‘안 주무셔요? 저 먼저 올라갈까요?’하며 아내가 내 볼에 살며시 입맞춤을 남기고 방으로 올라갔다. 가볍게 문을 닫고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이 애잔하게 망막 뒤편에 남았다. 오른 볼에 남겨진 아내의 입술 감촉이 혼자 남은 방 안의 유일한 따뜻한 느낌인 듯싶어 혹시라도 그 온기를 잃을까 나는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저 다 됐어요’하듯 덜거덕 거리며 혼자 돌고 있는 레코드 판을 보고 판을 갈아주러 일어났다. ‘늦은 밤엔 피아노가 낫겠지’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듣고 있던 브람스를 내려놓고 대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다시 자리로 돌아오다가 문득 눈길이 책장 맨 밑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앨범에 머물렀다.
참 오랜만에 펼쳐보는 약혼식 앨범이었다. 아내를 맨 처음 만난 것이 75년이니까 이제 꼭 40년이 지났다. 만난 지 8개월 만인 76년 6월에 약혼을 했다. 약혼하던 그날의 모습 하나하나가 바로 몇 시간 전의 일들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이렇게 나이 들어서 이제는 누구에게나 노부부로 불리는 것이 실감이 안 난다. 약혼식장의 아내의 모습은 너무도 곱고 청초하였다. 이렇게 순결하고 아름답던 여인을 데려와 과연 아내로 아이들 엄마로 내 인생의 가장 귀한 반려자로 제대로 대우를 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했을 때 코 끝이 찡하도록 미안한 생각 고마운 생각이 들어 아내가 자고 있을 침실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다시 앨범을 한 장씩 넘기다가 맨 마지막 장에 스크랩되어 있는 글 한 편을 만났다. 글의 제목은 ‘실수’였고 1977년 5월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으니 지금부터 38년 전 내가 서른 살도 되기 전 신혼 시절에 쓴 글이었다. 당시 쥬단학이란 화장품 회사 홍보잡지에 실렸던 글인데 아내가 스크랩해서 앨범에 보관해 놓았었다. 글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잠시 지나간 나날들에 대한 회상에 잠겼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은 2악장 안단테 소스테누토로 옮겨가고 있었다. 동그랗게 방 안을 채우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 나의 회상도 깊어갔다.
약혼한 지 두 달 뒤 제대를 하면서 곧장 출판사에 들어갔다. 출판사에 들어가 일을 배우고 때가 되면 내 출판사를 세운다는 것이 군에 있는 4년 동안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며 내가 꾸어왔던 꿈이었다. 내가 들어간 D 문화사는 당시 꽤 컸었고 지금도 내로라하는 출판사 중의 하나인데 나는 편집책임자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만난 출판사는 내가 학창 시절부터 꿈꾸어오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양서에 대한 나의 생각과 출판사 사장의 생각은 너무나 달랐다. 양서(良書)란 말 그대로 좋은 책이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사장에게 양서란 잘 팔릴 수 있는 책이었다. 편집 회의 때마다 다툼이 있었고 결국 두 달 만에 나는 출판사 문을 나왔다.
11월 초의 결혼식을 불과 열흘 앞두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왔으니 양가 부모님의 걱정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나와 아내는 손잡고 놀러 다니기 바빴고 결혼이 무엇인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마냥 즐겁기만 했었다. 주변의 걱정스러운 눈초리와는 달리 이제나 그제나 항시 나를 믿어 주는 아내는 그때도 내 손을 잡고 ‘잘하셨어요. 좀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지요, 네?’라고 말하며 밝게 웃기만 했다.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기 시작한 것은 결혼식장에서였다. 하객들을 맞기 위해 식장 입구에 서있었는데 장인 장모께서 바로 내 옆에 서계셨다. 신부 측 하객들 중 많은 분들이 장인어른께 신랑 직업이 무엇이냐고 여쭈는 것을 들었다. 은행 지점장이셨던 장인어른은 말수가 적고 이해심이 무척 많으신 분이었는데 그때마다 ‘준비 중’이라고 답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때 문득 나는 장인어른께 참으로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버젓한 직장에 있었더라면 그때 장인어른께서 당당하게 대답을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그렇게 양가 부모님들이 바라던 좋은 직장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혼자 고집을 부리면서 조그만 출판사를 직장이라고 들어가더니 결국 두 달도 못 채우고 때려치우고 나온 백수건달이 귀한 집 하나밖에 없는 딸을 데려가겠다고 염치 좋게 결혼식장에 서있는 나 자신이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그래 취직을 하자. 신혼여행 다녀와서는 양가 부모님이 원하시는 크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자’라고 결심을 하면서 신랑 입장이라는 사회자의 말에 따라 식장 안으로 들어갔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11월 중순은 취직 시즌이 아니었다. 그 당시 가장 좋은 직장으로 꼽히고 있었던 삼성, 대우, 현대, 럭키 등등의 종합무역상사들은 이미 10월 말까지 신입사원 모집을 끝냈었다. 다행히 종합무역상사 중 유일하게 국제상사(나중에 ICC Corporation으로 바뀜)가 회사 내부 사정(양정모 회장님이 부친상을 당해서 사원 모집이 늦어졌다고 함)으로 11월 말에 신입사원 모집이 있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회사에 취직할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었던 나는 종합무역상사가 무엇인지 무역이 무엇인지 국제상사가 무엇인지도 몰랐었지만 양가 어르신들께 여쭈어보니 삼성 대우만은 못하지만 들어갈 수만 있다면 국제상사도 아주 좋은 회사라고 말씀하셔서 생전 처음으로 취직시험을 보고 취직을 했다.
원해서 한 취직도 아니었고 회사에서 하는 일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으니 회사 다니는 일이 재미있을 턱이 없었다. 처음 한 두 달은 일도 배워야 했고 사람들도 익혀야 했기에 정신없이 지냈지만 몇 달이 지나고 나니 매일 하는 일이 그게 그거고 이렇게 비창조적인 일을 단지 월급 받자고 다녀야 하나 하는 지겨운 생각뿐이었다. 옆의 동료 직원들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무역 동향이 어쩌고저쩌고 새로운 품목 개발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대리님 과장님도 잘 찾아다니고 저녁이 되면 회사 돈으로 먹는 회식 건수 만들기에 바빴지만 나는 그냥 지루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지난번 출판사 때려치우듯이 회사를 그만두었다가는 양가에서 야단이 날 터이고 또 이제는 나만 믿고 사는 사랑하는 아내도 있는데 그럴 수도 없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회사고 무어고 다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은 안 되고 그냥 답답하기만 했었던 그때 쥬단학(당시 한국화장품의 브랜드였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홍보부에서 일하고 있었던 지인이 글을 써달라기에 쓴 글이 이 글이다. 나름대로 그때 나의 심정을 담아내고 있는데 서른 살도 안 된 그것도 신혼의 꿈에 잠겨있어야 할 청년이 썼다기에는 너무도 염세적인 냄새가 강하다. 그렇지만 이제 곧 고희를 바라보는 내가 삼십 이전의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글이기에 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잡지에 실렸던 그대로 옮겨 적어보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나와 같이 38년 전의 젊음으로 돌아가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실수(1977.5 쥬단학 지 젊은이의 광장)
나의 誕生은 내 커다란 失手 중의 최초의 것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울음을 터뜨리며 첫 번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뒤였다. 禁斷의 箱子를 열어 세상에 재앙과 죄악을 퍼뜨린 판도라의 호기심처럼 쓸 데 없이 세상을 알고 싶다는 나의 無意志的 好奇心은 그만 출생의 좁은 門을 여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만일 자신을 억누를 수 있는 자제력을 태어나기 전에 가졌었다면 나는 결코 이런 큰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꼴 어지러운 세상사를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고 지금쯤은 生 이전의 영원한 평안을 우주의 어느 한 구석에서 향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도 가을 하늘은 그렇게도 평화스러워 보이는 흰 뭉게구름 속일 수 있고 아니면 밤하늘에 반짝이는 은하수의 어느 아름다운 별 그림자 속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나는 릴케처럼
오 저 위 달빛 속에 있는
한 그루 무화과나무의 흔들림이
그대에게 주는 느낌은 어떤가
라고 흥얼거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철이 들기 전에 죽지 못했다는 것은 내 두 번째의 큰 실수였다. 아는 것이 힘이기보다는 病인 요즈음의 세상에선 아무것도 알기 전에 엄마의 행주치마 속에서 죽어버렸다면 나는 삶이란 적어도 늦가을 고추잠자리의 빨간 꽁지만큼이나 그 투명한 날개의 움직임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온통 돈 따먹기 놀음판이 되어버린 추악한 거리 속을 구두창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매일매일의 삶이 새로운 삶을 향한 전진이 아니고 오히려 한 발짝 한 발짝 죽음을 향하는 行軍이라는 사실은 내 세 번째의 큰 실수이다.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점심시간이 지나면 또 눈이 빠지게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우리들 생활의 대부분의 몫을 차지하는 기다림이란 행위가 반짝이는 삶의 요소가 못되고 죽음을 향한 빛바랜 징검다리라는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必滅이란 치명적 운명을 짊어진 인간 된 나의 큰 실수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실수만 가득한 전혀 무의미한 것인가? 아니 판도라의 상자 속에 아직도 희망만은 남아있듯이 나도 삶의 모든 것을 궁극적인 절망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희망의 시작으로 본다면 나는 또 한 번 릴케의 詩를 흥얼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껍질이며 잎사귀이니까요
누구나 스스로 갖고 있는 위대한 죽음,
죽음은 그 주위에 모든 것이 돌아가는 과일입니다.
2015. 01. 06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