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운 김동찬 Jan 19. 2024

나무야 나무야

마른 몸 닫지 않는 너의 자세, 닮고 싶다

로토루아에서


지난달에 로토루아(Rotorua, 뉴질랜드 북섬의 관광지, 싱가포르만 한 호수가 있음)에 갔었습니다.


교회 일로 다녀온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날씨도 좋았고 모처럼 아내와 더불어 하는 나들이라 가는 길 순간순간이 아름다웠습니다. 저녁나절 로토루아에 도착한 뒤 숙소에 들기 전 박물관 뒤편 로토루아 호숫가를 거닐다 의외로  아름다운 곳을 만나 발길이 머물렀습니다. 로토루아에 몇 번 갔었지만 과연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눈길을 사로잡는 저녁 풍경이었습니다.


일몰, 호수, 겨울나무, 작은 물새들, 눈에 들어오는 하나하나가 매혹적이어서 작은 시재(詩才)라도 있었으면 그 자리에서 자연스레 시 한 편이 나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쉬운 대로 사진만 찍었습니다.

로토루아 호숫가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자꾸 호숫가 풍경이 생각나서 할 수 없이 일어나 시(詩) 한 편을 만들었습니다. 작은 새들을 너그럽고 소담스럽게 받아 준 나무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야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로토루아 호숫가에서-  


나무야 나무야

너를 닮고 싶다

꽃 지고 잎 져도

빈 가지 부끄러워 않고

벌린 팔 거두지 않는 너의 자세


나무야 나무야

네게 배우고 싶다

마지막 열매마저 떨어졌어도

헐벗음 부끄러워 않고

마른 몸 닫지 않는 너의 자세


이 호수에 낮이 가고

저문 저녁이 다가올 때에

나무야 나무야

네 빈 가지 마른 몸에

내려앉는 것은 어둠만이 아니구나


이 저녁 추운 호수에

날아드는 수많은 새들도

어둠과 함께 네 위에 내려앉는구나

이 새들을 기다리느라

바람도 견디고 추위도 견디며

빈 가지 마른 몸

거두지도 닫지도 않았구나

나무야 나무야


이 호수에 빛은 가라앉고

바람은 자고 어둠은 더욱 짙어가는데

나무야 나무야

네 빈 가지에 새의 잎이 솟았구나

네 마른 몸에 새의 꽃이 피었구나

네 밑동에 새의 열매가 쌓였구나


나무야 나무야

네 한창때보다 훨씬 아름다운 네 모습

어둠 속에 더욱 빛나는구나


2014. 9월 석운 씀


매거진의 이전글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