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장에 선생님 말씀을 못 받아 적은 날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어린 소녀. 이 어린이는 너무도 착실하게 자라온 탓에 한 달 월급을 의미 있게 쓰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직장인으로 자랐다. 그녀의 통장 잔고에는 2000만 원이 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녀는 2만 원짜리 폰케이스 하나를 살 때도 며칠을 고민해야 했다. 그녀의 계산대로라면 그녀는 30살이 되는 날 1억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조금 지쳤다. 숫자로 만들어진 목표는 삶을 팍팍하게 한다. 키라는 열두 살에 부자가 되었는데, 30살에 1억을 목표로 하는 어른은 그렇게 멋있지 못한 것 같다. 너무나도 소시민적인 목표이다.
그녀가 이런 목표를 세운 것은 너무 모범적으로 자란 탓이다. 정답을 잘 찾는 법만 배워온 그녀는 그것을 너무 충실하게 배운 탓에 정답을 쏙쏙 잘 찾는 어른이 되었다. 그녀가 30살에 1억이란 목표를 세운 것은 지금 이 시대의 정답이 30살에 1억을 모으는 것이라는 뜻이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모범적인 그녀가 20xx 년 x월 x일까지 라는 날짜를 정해놓지 않은 것은 어쩌면, 정해진 그날이 되었을 때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자신이 느낄 좌절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월요일 미술수업 준비물이었던 크레파스가 가방에 없었을 때 느꼈던 그 당혹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난생 머리가 빠지는 것을 걱정하게 된 그녀는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보다 세상은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한 사람의 세계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서서히 무너진다는 것을 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는데 건강하지 못한 육체 탓에 정신도 건강하지 못한 요즘, 그녀는 생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몸과 정신이 건강하고, 싱그러운 기운을 뿜는 사람. 그래서 그녀는 한 달 치의 월급을 그녀의 팍팍한 삶에 생기를 넣어주는 데 사용하기로 한다. 마치 시들한 식물에 비료와 영양제를 주는 것처럼 그녀의 삶을 윤택하게 해 줄 비료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순간에 반짝 빛나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