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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는 Aug 02. 2022

음악 에세이_01 계속 숨 쉬어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

 All we can do is keep breathing.

Keep breathing - Ingrid Michaelson


첫 곡으로 잉그리드 마이클슨의 <Keep breathing>을 고른 데는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경험과 관련이 있다.


나는 어이없게도 외국에서 범죄의 피해자가 된 적이 있다. 바로 몇 발자국 떨어진 근처에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해수욕장에서 순식간에 강도 세 명에게 집단으로 구타를 당했고, 그 여파로 전신을 다쳐 귀국 후에도 한동안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었다.


* 사실 이 에피소드는 아끼고 아껴서 재밌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써먹으려고 했는데 여기에서 풀어놓기가 아깝기도 하다. 어쨌든 그로부터 시간이 3년은 지났고 나는 지금은 웃으면서 당시 상황을 얘기하니, 나는 괜찮다고 사려 깊게 내 고통에 공감하며 겁먹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직접 몸을 크게 다쳐보니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불편함을 새로 알 수 있었다. 매끄러워 보였던 아스팔트 차도에 파진 곳이 그렇게 많은 걸 처음 알았다. 택시를 타고 턱이 생긴 곳을 지나갈 때면 작은 충격에도 허리가 시큰거려 운행 내내 뒷좌석에 누워있어야 했다. 평소엔 10초를 남기고 훌쩍 건넜던 횡단보도의 시간이 너무 짧아 기다리는 차들 보라고 민망함에 더 절뚝임을 연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신체의 불편함과 별개로 나를 더 아프게 했던 것은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질책 섞인 애정이었다. 누군가는 2차 가해라고도 하겠다. 나를 때렸던 가해자들보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내 고통을 상상하고 전하는 (따뜻해야 할) 위로 한 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히고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 관심과 위로 속에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에 부합하지 않는 나의 부주의함을 탓하는 원망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어쭙잖게 위로하기를 그만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상황에서도 피해자는 어떻게든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세심한 말이더라도 피해 상황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피해자에겐 다시금 트라우마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사고를 피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위로와 관심이 피해자 탓을 하는 것처럼 전달 돼버리는 거다. 사람들의 관심이 오히려 독이 되고 반복해서 2차, 3차 가해를 일으킨다. 그래서 피해자가 그 사건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고 감정을 추스리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피해자는 그 과정에서 마음이 닳고 닳아 사람들로부터 벽을 세우고 문을 닫아버린다. 다시 그 문을 열고 나오기까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즐겁게 일상을 지내다가도, 흔한 인터넷 기사 하나, 유머용 움짤 하나에도 갑작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 문을 닫고 나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나오고, 다시 들어가고. 나오고, 다시 들어가고. 그렇게 점점 감정과 기억이 희미해지길 바라지만 사실 잊을 수 없는 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것 같다. 폭력은 그렇다.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아문 뒤에도 그 흉터는 남아 흉터의 존재를 느낄 때마다 반복적으로 그때 상황이 떠오르고 나는 방어적인 태도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최근 인하대 성폭력 및 살해 사건으로 대중들의 분노가 치솟았을 때 피해자의 유족들은 이 일이 더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봤다.

바깥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목소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들은 법이 가해자를 강력하게 처벌해 주길 바랐고, 안전이 부실한 대학의 안일함을 꾸짖기도 했으며, 각종 성범죄로 여성들이 안심하고 지내기 어려운 사회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피해자에 대한 여러 안타까움을 담은 목소리들도 있었지만 2차 가해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 적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탓하진 않는다. 물론 그중에는 남의 불행을 유희 거리로 쓸 정도로 결핍이 넘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 타인의 불행을 염려할 정도로 따뜻하고 정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피해자가 되기 전까진 나 또한 그들과 같았다. 이성과 감성이 뒤섞여 논리적으로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다가도 부당한 현실이 주는 불안과 원망을 토해냈다. 그리고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쏟아내는 표현들로부터, 어쩌면, 나도 모르게, 피해자를 탓하거나,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거라며 2차 가해를 저질렀을 것이다.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가진 내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참 불편하고 슬프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더라도 내가 그 당사자의 신체와 정신을 뒤집어써보지 않는 한 어떻게든 내가 건네는 말은 그저 시끄러운 잡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기사를 꾸준히 찾아보면서도 내가 느끼는 속상한 감정들을 토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미 불이 지펴져 화르르 불타는 장작 더미에 나 또한 장작을 넣지 않았다. 그런 충동이 들 때마다 큰 알약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듯 말을 꿀꺽 삼키곤 했다.



The storm is coming but I don’t mind.
People are dying, I close my blinds.
All that I know is I’m breathing now.

폭풍이 다가오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아.
사람들은 죽어가, 난 창의 블라인드를 내려.
내가 아는 건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단 것뿐이야.

I want to change the world, instead I sleep.
I want to believe in more than you and me.
But all that I know is I’m breathing.
All we can do is keep breathing.
Now.

난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대신 나는 잠을 자.
너와 나보다 더 믿고 싶어.
그러나 내가 아는 건 내가 숨 쉬고 있단 것뿐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계속 숨 쉬는 거야
지금.


쏟아지는 목소리들 속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나날이 밝혀지는 사건을 접하는 것이 매우 힘들면서도 거기에 관심을 끊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사건이 흔해빠질 정도로 숱하게 벌어져 일상적으로 여겨지는 일 중 하나가 될까 봐 우려했다. 그래서 꾸준히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고 표현하는 것이 피해자를 돕고 연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진 선의와 행동하려는 노력이 따스우면서도 불에 덴 것처럼 시큰거렸다. 나는 그들에게 멈추고 멀어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분노라는 장작은 행동하고 연대하는 연료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신을 태워버려 소진시키기도 한다. 내가 그랬다. 내가 사건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표현하는 게 피해자를 돕고 세상을 바꾸는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분노가 눈을 가렸던 탓일까?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데이고 다치면서도 나보다 더 수렁 속에 빠져있을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계속해서 관심을 끊지 못하고 어떻게 더 표현하고 행동할지를 고민했었다.


그러다 쏟아지는 2차 가해들을 접했을 때 갑자기 내 트라우마가 도져버렸다. 사람들과 평범한 대화를 하다가도, 그냥 길을 걷다 음악을 듣다가도 갑자기 쏟아지는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구구절절 내 감정의 원인을 설명하고 해명하기도 구차했다. 나는 순식간에 문을 닫아버리고 내 동굴에 가둬져야 했다. 그리고 이미 시간이 꽤나 흘렀음에도 터져 나오는 감정을 다스릴 수 없어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이 상황 자체가 난처했다.




그래서 나는 어설픈 솜씨로라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뒤섞여서 나조차 구분하고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을 곱게 갈아 문장 하나, 선 하나에 담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창작물들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것이 누군가의 마음에는 잔잔한 위로로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고 욕심도 품어봤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바깥 세계의 폭풍우 속에서도 내 몸과 정신만은 고요해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감정들을 하나하나 녹이고 조심스레 틀에 넣고선 망치로 두드렸다. 어느새 형태가 갖춰진 틀에 찬물을 끼얹으면 푸슈수 하는 소리와 함께 정제된 감정들이 말간 표면을 드러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나 혼자만이 가졌던 거친 분노와 슬픔이 둥글둥글 깎여나갔다. 제대로 벼려냈다고 생각했다가도 불순물을 발견하면 다시 녹여내고 다듬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럴싸하게 다듬어진 감정들을 이제는 바깥세상에 드러낼 수 있겠단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글을 적극적으로 쓰기로 다짐했다. 이왕 열심히 할 거면 브런치 작가가 돼보자 싶어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넣었고 몇 번 거절당할 거란 예상과 달리 한 번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화요일의 브런치 담당자분이 내 글들에서 어떤 점을 좋게 봤을까가 궁금하다. 주말이 막 지나 월요병을 겪고 피곤에 절여있음에도 내 글을 읽고 나를 작가로 뽑아주다니 얼마나 관대한 분일까 상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막상 작가가 돼보니 나는 딱 한 번 메인에 운 좋게 올라봤을 뿐, 그로 인해 구독자가 꾸준히 늘거나 조회수가 증가하지도 않았다. 눈치껏 브런치 세상은 어떤 곳인가 돌아다녀보니 브런치엔 정말 프로페셔널한 작가님들이 넘쳐 가끔은 내가 작아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의 개인적 경험과 생각들이 어떤 익명의 독자의 취향엔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글을 쓸 용기가 생긴다. 사실 이렇게 긴 글은 브런치가 바라는 글이 아닌 것도 눈치로 배웠지만, 나는 투머치 토커이기 때문에 글을 짧게 쓰기가 어렵다. 화면을 넘기지 않고 여기까지 읽어주는 독자가 한 명이라도 계시다면 괜찮다.


아무튼 아직은 나 스스로를 ‘작가’라고 정의하진 않지만, 이제는 어디 가서 “저는 취미로 글을 써요.”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그동안 쓴 글들을 꽁꽁 숨겨뒀던 내가 이제는 하나하나 풀어낼 줄도 안다. 글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법도 배우고, 글 얘기로 다른 사람들과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주변 지인들에게 브런치 작가를 신청해보라 한다. 생각이 많고 끙끙 끌어안고 있는 고민들이 많다면 더더욱 글을 써보는 것을 권한다.


글을 잘 쓰지 못해도 괜찮다. 참고로 나는 주로 내 감정들을 일기장에 쏟아냈었는데 봉인된 2016년 다이어리엔 여기에 미처 담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감정에 휩싸인 내 감정들로 가득 차 있어 당시 내가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원색적인 욕이라도 글로 쓰다 보면 ‘아무개 죽어라!’라는 문장마저 어느새 하찮아지고 내가 가진 분노의 감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욕구가 생긴다. 그러다 보면 제삼자의 눈으로 글을 쓰려는 열망이 생기고 달궈졌던 감정이 담백한 문장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와 화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서투르더라도 글을 쓰는 건 참 좋은 행위다.


이제 글을 맺기 위해 밝히는 건데, 사건 직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던 나에게 잔잔한 울림을 줬던 위로는


“네가 여기 (살아) 있어 다행이야.”였다.


당시 나를 위로해 줬던 모든 이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덧붙이자면, 이 글이 누군가에겐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숨 잘 쉬며 살아있고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괜찮아질 거란 자신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다.


오늘의 당신이 쉬는 숨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계속 숨 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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