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2. 그리운 금강산

- 금강산 여행일지 -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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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운 금강산


여행을 시작하며


잠실에서 금강산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명단 확인을 마친 뒤 버스는 도심을 빠져나가 고성 통일전망대로 향했다. 내 옆자리에는 서울에서 할머니와 1년간 지내며 조국을 배우고 있는 큰딸이 함께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내 고향 이북 땅을 밟게 해 주고 싶었다. 기적처럼 찾아온 이 기회를 잡기 위해 미련 없이 나는 일터를 떠났다.

버스는 홍천과 인제를 지나 5월의 싱그러움 속을 달렸다. 네 시간 만에 첫 집결지인 고성 금강산 콘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북한 여행안내를 받고, 사전에 신청해 둔 북한 관광증과 출입국 신고서를 받았다. 북한에서는 달러화만 사용 가능해, 여행자 1인당 전자카드가 지급되었다. 우리도 카드에 충전금을 넣었다.

고성 통일전망대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했다. 우리 500여 명은 남측 사무소에서 출국 검사를 마쳤다. 일행은 금강산 관광버스 10여 대에 나누어 타게 되었다. 가슴은 설렘으로 뛰었고,

두근거리는 가슴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삼팔선 너머의 풍경


버스는 비 포장된 좁은 길을 덜컹이며 달렸다. 남측 초소에는 철조망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무장한 헌병이 서 있었다. 우리가 흔드는 손짓에 그들은 미소로 답했다.

이윽고 군사분계선, 삼팔선을 넘었다. 버스 안은 숨조차 멎은 듯 고요했다. 잡초만 무성한 시골길, 풀벌레와 바람조차 납작 엎드려 있었다. 고향 땅으로 들어가는 이 쉬운 길이 어쩌다 금단의 길이 되었을까.

북한 초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장한 북한군 십여 명이 보였다. 우리의 손짓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전투태세의 긴장이 감돌았다. 그들은 구식 군복을 입은 왜소하고 마른 군인이었다. 남북 군인을 나란히 세워 놓는다면 과연 같은 피를 나눈 동포라 할 수 있을까. 50여 년의 분단은 사람들의 얼굴과 몸까지 바꾸어 놓은 듯했다.

빈 들판에서는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인민군들이 철도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자재는 모두 현대건설에서 제공한 것이라 했다.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돌아앉아 외면했다. 군데군데 서 있는 보초병도, 밭일하는 아낙들도 무표정했다. 상부의 지시가 있었을까.

잡초만 무성한 들판에는 드문드문 낡은 기와집이 보였다. 크기와 모양이 비슷했고, 빈집처럼 느껴졌다. 가끔 걸어가는 주민이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40~50년 전 우리 농촌을 보는 듯, 정겨움과 측은함이 교차했다.

멀리 둥근 바윗덩어리들이 서로 기대어 누운 듯한 산이 보였다. 남한과 인접한 산이라 나무는 모두 베어져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의 신비로운 자태는 어디쯤에서 볼 수 있을까.


장전항의 해금강 호텔


장전 항. 동해 바다가 해변으로 반원을 그리며 들어와 주머니 모양의 호수 같은 항구이다. 그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고층 건물, 우리의 숙소 ‘해금강 호텔’이다.

짐을 풀고 출출해진 우리는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 온정각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는 무공해 건강식이었으나, 진수성찬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먹는 즐거움이 덜했다.

다음 날 아침, 창밖에는 금방이라도 부슬비가 내릴 듯한 하늘이 펼쳐졌다. 남부 지방에 내린 비가 북상 중이라는 일기예보를 들었기에,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떠나왔다. 호텔 식당에 내려가니 대부분 우비와 우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음식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딸아이는 어미의 마음을 읽고는

“엄마, 하느님이 내 기도는 들어주셔요.”하며 웃었다.


금강산은 부른다.


금강산은 서해 쪽 내금강, 동해 쪽 외금강으로 나뉘는 거대한 산이다. 버스는 행렬을 이루며 외금강으로 향했다. 포장되지 않은 좁은 산길을 따라 구룡연 코스를 오르면, 삼록수, 양지대, 옥류동, 금강문, 연주담, 비봉폭포, 구룡폭포, 구룡연, 상팔담 등 절경이 이어진다.

물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계곡을 따라 걸으니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산의 맑은 공기가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계곡 아래 바위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산천을 흔드는 듯했고,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소리에 혼을 빼앗겼다. 어느덧 검은 구름이 걷히고,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금강산의 경치를 오롯이 보여주려는 하늘마음 아닌가.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을 오르며 구름다리를 건너고, 가파른 계단을 숨 가쁘게 올랐다. 뾰족한 산봉우리 사이로 소나무들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평소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가파른 길에서 숨이 차고 땀이 흘러 뒤처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하며 지나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발아래 수많은 봉우리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서로를 껴안고 하늘과 정을 나누고 있었다. 꿈속에서 본 듯한 금강산 풍경 속에 내가 들어와 있었다.

바위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물은 비췻빛을 머금었다가 긴 계곡을 따라 춤추듯 흘러내렸다. ‘마시면 십 년은 젊어진다. 는 금강산 물맛에 가슴이 열리며 하늘과 소통하는 기분을 우리만 알까.

산세가 더욱 가팔라지자 숨을 몰아쉬는데 길 앞을 막는 검은 돌덩이가 섰다. 금강문이라 불리는 동산 같은 바위였다. 좁은 틈을 한 줄로 서서 숨을 죽이며 통과했다. 곧 옥처럼 맑고 푸른 물이 흐르는 옥류동 구름다리에 이르렀다. 잠시 멈춰 서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 잘 다듬어진 대반석 사이로 흐르는 옥구슬 같은 물소리에 정신을 잃었다

육당 최남선은 『금강 예찬』에서 옥류동을 이렇게 읊었다.


“기묘, 웅장, 밝음, 화려, 그윽함, 현묘함, 원만함, 빼어남, 소리, 색채, 정신, 기운 등 모든 미적 요소가 완벽하게 조화된 상태를 상상해 보라.”


연주담에 담긴 연초록 물빛에 가슴이 새색시처럼 설레었다. 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비봉폭포 앞에서는 가슴이 터질 듯 벅찼다. 전망대에 서자 귀가 먹먹해질 만큼 웅장한 폭포 소리가 울렸다. 구룡폭포였다. 전설에 따르면 아홉 마리 용이 내려와 놀던 곳이다. 폭포수에 흠뻑 젖으며 구룡연에 서니 마치 신선이 된 듯했다.

급경사의 상팔담은 험하여 오르기 힘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눈 녹지 않은 산길을 미끄러지며 헐떡였고, 딸은 끌어주고 밀어주며 나를 도왔다. 어느덧 산등성이에 섰다. 시야가 트이자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땀에 젖은 나를 저 멀리 일만 이천 봉이 맞아주었다. 한국민의 그리움, 금강산이 펼쳐졌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중략)

그리운 일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그리운 금강산을 목 놓아 부를 수 있는 순간! 끝없이 펼쳐진 산하에는 민족의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우리의 숨소리와 함께 분단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었지만 나의 산신령과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딸이 손을 잡아 이끌어 내려가야 했다. 그리운 임을 만나고 돌아가는 여인처럼, 발걸음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만날 님일까.


관동 팔경과 삼일포를 아시나요.


모란각에서 점심을 했다. 북한 음식이라 하면 함흥냉면이다. 꿩으로 육수를 냈다는데, 단맛과 신맛이 덜한 밍밍한 맛이었다. 국수 몇 가닥만 건져 먹다가 “지금 동포의 음식을 대접받고 있지 않은가.” 손님인 나는 남은 국물까지 마시며 예의를 지켰다.

오후, 온정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자 동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 푸른 호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삼일포였다. 삼십육 봉의 갖가지 괴석과 소나무 숲, 그 앞으로 트인 들판, 호수 위 작은 섬과 정자가 한 폭의 산수화였다.

단풍관 휴게소에서 북한 막걸리에 조개·멍게·문어를 곁들여 일행과 축배를 들었다.


거울 속 부용 같은 삼십육 봉에

하늘과 맞닿은 일만 이천 봉

호수 안에 한 조각 돌 섬 있어

바다를 찾는 객과 잠이 들었네.

— 조선 중기 양사언-


모란봉 교예단과 민족의 사색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보았다. 진달래 빛 한복을 차려입은 사회자가 꽃처럼 등장했다. 북한 특유의 억양과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건네는 환영 인사에 우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공연을 마치자 사회자가 ‘우리는 하나’라는 글을 들고 “우리 다시 만납시다”라 인사하자, 객석에서는 눈물이 터졌다. 만남은 하나로 만드는 것이어야 하는데….

꿈꾸는 민족은 죽지 않는다 했으니, 한민족의 혹독한 단련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만물상과 북한 청년


오월의 햇살이 눈 부셨다. 남은 일정은 금강산의 진수, ‘만물상’ 관광이다. 천선대, 망양대, 절부암, 귀면암, 삼선암, 관음폭포 등 이름난 경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시간 가까운 가파른 산행. 겁이 났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올랐고, 지팡이에 의지한 할머니도 내 앞에서 보였다. 오를수록 괴석들이 만 가지 형상을 드러냈다. 귀신 얼굴을 닮은 귀면암이 버티고 서 있었고, 수없이 이름 붙일 수 있는 바위들이 솟아 있었다.

정상에 서자 어제 멀리서 바라보던 일만 이천 봉이 깃발을 흔드는 듯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가가 젖어들었다. 이제야 그 노래의 꿈을 조금은 이룬 것일까.

산 위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등산화를 신지 않은 나는 엉덩이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 곁에는 남한 응급요원과 북한 청년도 함께 있었다. 청년과 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미국교포라는 신분이 그의 말문을 텄을까.

“미국 정부는 북한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물었다.

“국민은 굶어 죽는데 핵을 만들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태도를 위험하게 봅니다. 북한 현실은 너무 가슴 아픕니다.” 걸어 내려오는 30여분 동안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다. 청년은 얼굴을 굳혔지만, 우리는 대화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언젠가 그의 가슴속에도 변화의 불씨가 남기를 바라며, 나는 그를 아쉽게 떠나보냈다.


여행을 마치며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멀리 흰색 고층 건물이 보였다. 김정숙 휴게소라 했다. 요즘 이곳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서로 알아보지도 못한 채 늙어버린 얼굴을 비비며 통곡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선물센터에 들러 할머니에게 줄 선물을 고르려 했지만 눈에 띄는 물건은 없었다. 딸은 포장된 엿 두 상자를 샀다. 나는 ‘금강산 관광’이라 수놓은 타월을 골라 할머니 친구 분에게 나누어 드릴 생각을 했다.

이박삼일 동안 우리가 본 것은 금강산의 극히 일부였다. 내금강의 장연사와 사찰, 만폭동과 비로봉 등 수많은 절경이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자유롭게 여러 코스를 다니며 이 신비로운 산을 마음껏 누릴 날이 오리라 믿는다.

딸은 금강산에 온 것을 무척 기뻐했다.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한국을 떠나기 전에 금강산의 정기를 가슴에 담았다며 기뻐했다.

단풍 진 가을과 눈꽃 핀 금강산도 볼 수 있을까.

작은 한반도에 세계 명산에 견줄 백두산과 금강산이 있음은 벅찬 미래이다.


참고:

금강산관광은 1998년 김대중대통령 때 해상으로 시작했다.

노무현정부 때 첫 육로로 개방, 필자는 2004년에 다녀왔다.

박근혜정부 2008년 때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은 해결을 보지 못하고 개성공단까지 삼팔선은 철통같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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