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는 집의 대문 앞에, 혹은 대문 근처 골목에 노숙인은 아니지만 씻지 않아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누군가가 항상 같은 시간에 서성인다고 상상해 보자.
아니, 씻지 않아 나는 냄새가 아닌
당신 취향에 맞지 않는 지독한 향수를 뿌린
누군가라고 상상해 보자.
어쨌든 당신은 아마 시간이 갈수록 불편해질 것이다.
이 상황에서 스스로가 그 독한 향수에 익숙해져서 매일 맡게 되는 그 냄새가 향기롭고 그 덕에 하루하루가 즐거워지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마 굉장히 드물 것이다.
누군가는 같은 상황에서 그가 평생 내 집 앞에 있는 일은 ‘상식적’으로 없을 거란 생각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상식적’으로 그가 지금까지 매일 출몰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나의 하루를 망칠 가능성에 비중을 둘 것이다.
어느 쪽이 상식인가?
상식은 그저 내가 속한 집단의 보편적 생각 경향일 뿐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일어날 일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다.
’ 점친다 ‘ 는 말 그대로다.
사실상 추론 역시 그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날
뿐이니 일종의 점사와도 같다.
어느 날 아침 나가보니 매일같이 내 코를 괴롭히던 존재가 갑자기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오늘도 역시 그 자리에서 내 코를 괴롭힐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소위 상식을 기반으로 한 점사가
일으킬 수 있는 일이다.
아무 일도 일으키질 못한다.
가장 현명한 선택. 가장 무언가를 바꿀 가능성 있는 행위는 무엇일까?
접촉시도이다.
물론 접촉시도로 무언가를 확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점사를 넘는 의미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것뿐이다.
직접 대면하여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언제까지 그럴 것인지 등의 추가정보를 ‘질문‘해야 한다
그러면 그제야 간신히 ’ 가능성‘이란 게
생긴다.
내가 그의 사연에 감화되어 이해에 가까운 무엇을 하여 지독한 향수냄새가 다르게 느껴지던가
혹은 언제까지 견디면 상황이 바뀌리라는 걸
알 수 있던가.
그조차 아니더라도, 내가 이사를 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마저도 접촉시도를 통한 ’ 질문‘에서만 만들어진다.
물론. 모르는 이와의 접촉은 두려울 수밖에 없고 이 뻔한 것을 대부분은 피하며 그저 점사에 가까운 행위를 반복하며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아마도 그 두려움 탓이겠다.
세상일이 대개 이와 같다.
다시 강조하지만, 접촉시도만이 유일하게
변화 가능성을 여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