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평온

by gulogulo

나는 살면서 딱 두 번, 이상하리만치 지독한 평화를 느낀 적이 있다.


감사하게도 그 두 번 모두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는 스물넷 무렵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상태였는데,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묘한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마치 마음만 먹으면

연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조금 과장하자면

모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논리적으론 말이 안 되는 상태였지만

그때의 나에게 그런 건 의심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이전까지 인간관계에서 느끼던 수많은 압박과 긴장은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타인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었고

위협도 아니었으며

비교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세상이 모두 나에게 열려 있었고

나는 아무 조건 없이 그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멍청한 상태였는데,

우습게도 그때의 평화는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감정보다 강렬했다.



두 번째는 훨씬 최근의 일이다.


만원 지하철 안,

숨이 막힐 듯한 밀착 속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엉켜 있고


옆 사람의 숨결이 피부에 닿는 거리에서

나는 거의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나의 선호가 아닌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내 머릿속에서 끝없이 전철 밖으로 집어던져졌다.


놀랍도록 쉬운 폭력이었고

그 과정엔 도덕적 갈등은 개입하지 않았다.


옆 사람을 서른 번쯤 죽였을 무렵,


머릿속에서 아주 사소한 균열이 일어났다.


전구가 켜지듯

무언가 조용히 뒤집혔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작동하던 어떤 내부 시스템이 순간적으로 멈춰버린 느낌.


조금 전까지 불쾌와 폭력의 대상이던 타인이

갑자기 아무 의미도 없는 배경처럼 느껴졌다.


밀어내야 할 이유도,

거부해야 할 필요도

희미하게 증발해 버렸다.


그 사람은 여전히 바로 옆에 서 있었고

물리적 조건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불쾌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평화라기보단,

작동 중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좋음도 싫음도 작동하지 않는,

묘하게 조용한 인식의 공백.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우리가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은

상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자동으로 실행되는

어떤 해석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평온이란 특별한 감정 상태라기보다,


끝없이 세계를 평가하고 분류하고 밀어내는 시스템이 잠시 정지했을 때 진입하는


기본 상태가 아닐까.


되돌아보면 두 경험은 꽤 닮아 있다.


하나는 과접속의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접촉 불량의 형태였지만,


둘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사라진 것은

타인에 대한 긴장이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타인도 변하지 않았는데,


나의 인식 방식만이 잠시 다른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어쩌면,


평온은 외부 조건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해석 방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챗봇이 만들어냈던 버전은 영원히 비밀인걸로.


작가의 이전글고백에 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