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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구마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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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마 Dec 02. 2023

시한부 합법 한량

백수 탈출의 온도

밥벌이를 하게 됐다. 합격했단 전화를 받았을 땐 정말 기뻤다. 시키지 않을 화장실 청소까지 자진해서 하고 싶을 정도였다. 내 안의 노예근성을 끌어 모아 아주 개 같이 굴러야지 싶었다. 돈을 벌게 되었다는 것 보다도, 세상 어딘가 나를 받아주는 곳이 생겼다는 기쁨이 더할 나위 없이 짜릿했다. 갈 곳이 생기고, 할 일이 생겼다는 것. 그 또한 좋았다. 


이미 미적지근해진 상태에서 그 찰나의 환희를 상기하자니 쉽지 않다. 떠올리는 것도 귀찮아진 상태다. 집에 와서는 허무했다. 다음 주 목요일부터 교육을 듣게 되니 그전까지는 완전히 자유 시간인 셈이다. 그런데 그게 기쁘지가 않다. 이제 뭐 하지? 이제야 갈 곳이 생겼는데, 나는 비로소 갈 곳이 사라진 사람처럼 굴고 있다.


대학 친구들 단톡방에 이 소식을 아직 알리지 못했다. 어떻게 운을 뗄지조차 모르겠다. 그래, 이게 문제였을까? 내가 남들 시선에서 볼 때 자랑할 만큼 인정받는 직종에 취업하지 못해서? 서울대 나와서 왜 거기서 일하냐고 할까 봐? 솔직히 그것도 맞다. 제일 친한 친구, 오빠, 동생한텐 말했지만 엄마한텐 말 못 했다. 엄마가 내 소식을 남들에게 알릴 때 맞닥뜨려야 할 떨떠름한 축하가 원치 않아도 떠오른다.


현재 내 상황과 능력에 적합하고 보수도 내 딴엔 만족스러운 일자리인데 자꾸만 기가 죽는다. 처음엔 너무 감사하단 생각 밖엔 안 들었는데. 행복했는데. 그런데 지금 이 기분은 뭐지. 


이 글에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되었는지 적지 않는 이유는 내 출신 대학과 더불어 직종까지 밝혀버리면 그 외 내 개인사와 더불어 내가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게 될까 봐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사회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나 또한 내가 '좋은 곳'에 취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걸까. 어디라도 붙어서 일하게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를 깨닫게 된다.


이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당장 내가 그 일을 할 여건이 안 되니 남은 선택지들 가운데서는 그래도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성장하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추후에 하는 데에 큰 발판이 되리라 생각했다. 이만하면 된 거 아닌가. 심지어 일은 시작도 안 했다. 그런데 난 뭘 걱정하는 거지?


가서 부딪혀보면 더 나을까? 아직 시작을 안 해서 너무 생각이 많은 걸까. 원한다면 남은 며칠을 나는 정말 신나게 놀 수도 있다. 돈은 넉넉지 않지만 그래도 그 안에선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주 오랜만에 우울하고 슬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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