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편 수를 나눠놓은 글들을 마무리하고 나서 이 글을 쓰려고 했다. 짜임새 있게 구성해서 계획 하에 쓰고 싶었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자 가족의 삶이란 원래 예기치 못한 사건의 연속이기에, 이런 글로 시작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알코올중독자 엄마의 자살 협박. 그게 이 글 주제다.
내가 두 알코올중독자들의 자녀라는 인식이 선명해진 것은 우습게도 최근이다. 아빠가 알코올중독자라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경찰을 불러야 했던 그날 밤도 아빠는 취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내 구체적 기억을 통해서가 아닌, '만취한 아빠를 묘사한 내 일기가 법정에서 증거로 쓰였다'는 사실을 떠올림으로써 끄집어낸다. 알코올중독에 대한 이해가 빈약했던 어린 시절에도 그를 중독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일이었다.
열 살에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 입소했다. 아빠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그 시점에서 피해자로 한데 묶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쪼개졌다. 만취한 엄마가 나를 밟고 걷어찬 그 밤 이후로.
나는 엄마가 피해자이기를 바랐다. 하나 남은 동아줄이 내 편이기를 바랐다. 사랑해야 하는 엄마가 무고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 밤을 지웠다. 우리는 쪼개지고도 긴 세월을 한데 묶일 수 있었다.
이따금 엄마는 온화했다. 아빠에게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을 술을 마시지 않은 엄마에게서는 볼 수 있었다. 온화한 엄마는 집에 친구를 데려오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을 해주겠다면서. 알겠다고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엄마가 알코올중독자라는 걸 받아들이기 전부터, 나는 내 친구가 보지 말아야 할 엄마의 모습이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최근에 약 40일간의 기록적인 단주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반기고 사랑했다. 그리고는 엄마가 바뀌었다고 착각했다. 이제 엄마는 술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믿었다. 아무렴 술이 유일한 낙이라는데, 조금은 즐겨도 되지 않겠나 싶었다. 그래서 기꺼이 방심했다. 다시 술을 입에 댄 엄마는 전보다 빨리 취하고 전처럼 무너졌다. 술을 끊겠다던 그 비굴하고도 단호한 다짐들에 수없이 배신당하고도 다시 믿었다. 늘 그랬듯 이번은 진짜이길 바라면서.
토요일 아침 여섯 시. 엄마가 집에 돌아왔다.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엄마가 전화라도 받기를 바랐다. 한 번은 연결이 되지 않았고 다음 두 번은 3초 지나 끊어졌다. 그다음에야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여느 때의 취한 목소리로. 이럴 바엔 입원을 하라고 쏘아붙였다. 곧이어 돌아온 엄마는 눈을 붙이는가 싶더니 다시 나갔다. 그저 해장술을 마시러 나갔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 내가 죽어줄게
오후 3시에 문자가 왔다. 다른 가족에게는 전화가 왔다. 돌아오라고, 어딘지 말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이미 만취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한 이력이 있다. 다시 위험한 상황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했다. 119에 신고 전화를 했다. 정확한 위치 확인을 위해 112에도 신고하라는 말에 그렇게 했다.
다시 연락이 왔다. 엄마는 바닷가 모텔에 있었다. 가족 모두에게 자살을 예고하던 엄마는, 경찰 앞에서 그저 여행을 온 것뿐이라 했다. 엄마가 안전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엄마와 통화 연결이 됐다. 죽어버린다는 말만 반복하던 엄마가 드디어 다른 말을 했다. 창피하게 일을 크게 만들었다고 화를 냈다. 그 말을 듣고야 정말로 엄마가 안전하단 걸 알았다.
알코올중독자인 엄마가 만취해 자살 충동에 휩싸였다고 믿는 것과, 그것이 자살 협박이었음을 깨닫는 것. 겪어 보니 후자가 더 고통스럽다. 알코올중독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중독자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죽어버린단 말을 아주 강력한 무기로써 사용한다고 했다. 철저히 비전형적이어야 할 일이 어떤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것이 된다. 덜 외로워지는 순간과 더 외로워지는 순간의 교차점이 있다면, 이런 걸 알게 될 때가 아닐까.
내가 알코올중독자'들'의 자녀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다. 내가 그들을 벗어나거나 그들이 중독을 벗어난다 한들 여전히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ACOA(Adult Children of Alcoholics, 알코올중독자의 성인 자녀)의 특징이 그 어떤 진단명보다도 나를 잘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이 또한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믿음이 때때로 흔들릴 때에도 머지않아 다시 붙드는 것이 옳은 길임을 받아들인다. 알코올중독자들의 자녀로 나고 자랐지만 그들의 한계가 내 한계는 아니다. 어떤 삶을 살겠노라 쉽게 선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알코올중독자들의 자녀임을 시인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내 길에 설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평온을 비는 기도, 라인홀드 니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