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피암시성
1편: ADHD가 조울증 약 4년 먹은 썰.txt (1)
2. 어느 성인 ADHD가 조울증으로 잘못 진단된 사연
1편을 2년 전에 써놓고 뻔뻔하게 이제야 이어서 쓰는 이유는... 그냥 내가 심심하고, 사실을 할 일을 미루고 있고, 하필이면 방금 메모장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내가 옛날에 약 먹은 기록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은 ADHD인 사람이 약을 저렇게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심지어 저걸 책임감 있게 꼬박꼬박 챙겨 먹게 되면 삶이 어떻게 되는지를... 그러니까 내가 그 4년간 대체 뭘 겪어온 건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나처럼 잘못 진단돼서 나만큼 고용량 조울증약을, 심지어 4년 먹은 사람이 또 있을까? 나 말고 또 있진 말아야 한다. 그딴 걸 또 겪은 사람이 세상에 더 있으면 너무 슬프니까. 왠지 세상이 원망스러울 것 같으니까. 근데 그래도 이 억울함을, 그 기간 동안의 고난을 얼핏 짐작이나마 해줄 사람은 세상에 있었으면 좋겠다.
ADHD인데, 조울증으로 진단되고, 그게 4년이나 이어진 사연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해 5월에, 나는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다. 자살사고가 극심했던 시기였다. 나를 담당한 의사가 한 질문 중 이런 게 있었다. "평소보다 더 에너지가 넘쳤던 때가 있나요?"
정확한 워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조증삽화가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때 나는 곰곰 생각하다가 "네.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부연 설명으로, 원래는 무기력하고 소극적인데 동아리를 들어가고 취미 학원을 두 개나 다니면서 열심히 부지런히 살던 시기가 있었다고 대답했다. 정말로 내게 그런 시기가 있었다. 나 스스로 내가 마음에 들었었다. 그런데 내 대답은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질문의 방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곧이어 잠을 안 자도 쌩쌩하던 시기가 있었느냐 물었다. 나는 또 잠깐 생각했다가 그런 적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사실은 그냥 뭔가 글이든 영상이든 재밌는 걸 보거나 해서 한참 몰입하느라 새벽 늦게까지 안 자고 깨어있던 그런 날이 며칠 있었다는 거였는데, 난 내 대답이 어떻게 비칠 수 있는지를 당시 몰랐다. 그때 난 조증이란 것 자체를 몰랐으니까.
의도는 없었으나 오해를 살 만한 대답을 연이어하고, 또 하나 내가 후회하는 게 있다. 나도 모르게 사실과는 조금 비껴 날 정도로 대화의 '방향'을 의식해 대답했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넘쳤던 때가 있고, 잠 안 자도 쌩쌩했던 때도 있다고 대답하고 나니, 아마 의사는 그 직후 그 시기가 같은 시기였냐 물은 것 같다. 이 시기가 정말로 겹쳤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더 정확히는 내가 이따금 잠을 안 자고 뭔가에 몰두하는 것은 우울하든 비교적 우울하지 않든 어느 시기에나 간헐적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나는 의사가 그렇게 묻는 순간, 사실 여부보다 '그럴듯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기억은 흐릿한데, 의사는 뭔가 눈이 반짝이며 대답을 듣기 전부터 내 답을 예상하는 것처럼 보이고, 여전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뭐가 더 '그럴듯한' 대답인지는 너무도 쉽게 분간이 됐기에, 또 나는 어리석게도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나중에야 나는 내가 피암시성이 높고, 이조차 C-PTSD와 ADHD를 가진 사람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특성임을 알았다.
비극은 연이어 일어났다. 내가 말로 뱉은 것과, 설문지 결과가 일치해야 할 것 같았다. 의사의 질문 중 상당수는 뒤이어 한 설문지에서도 등장했는데, 그때 나는 내가 말로 뭐라 대답했는지를 떠올리고 최대한 일치하는 방향으로 응답했다. 아마 설문지의 워딩이 더 명확하고 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정도 응답의 정확도를 포기하더라도 내가 이미 뱉은 말과의 일치도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일종의 도덕강박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숨 쉬는 것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으니까, 구태여 더 잘못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 온갖 검사와 설문들 사이에 포함되었던 내 정신과적 가족력 또한 양극성장애 진단에 무게를 더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외할아버지와 친삼촌은 자살로 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나를 빼고도 가족 모두가 정신과 환자다. 아마 이 점이 우울증보다는 유전적, 생물학적 소인이 좀 더 큰 쪽으로 진단을 바꾸게 하지 않았을까, 이것도 조금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은 게 내 생각이다.
그렇게 그 꼴랑 5일 입원해 있던 병원을 나오고 나서도, 나는 어딜 가나 조울증 환자였다. 조울증도 쉽게 진단되는 병이 아니다 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치료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상담을 길게 해 준다는 정신과를 간신히 찾아 예약을 했는데, 나중에 다시 전화가 왔다. 조울증은 약물치료가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 병원과 맞지 않을 것 같다며 예약을 취소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도 다 같은 조울증 환자가 아니지 않나? 그리고 난 2형인데... 라며 순간 억울했지만, 뭐라 더 말을 보탤 에너지도 없었기에 군말 없이 알겠다고 했다.
이곳저곳 병원을 전전했다. 어딜 가야 내가 좀 더 나을까,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를 구걸하듯 바라면서 2차 병원도 가보고, 무리해서 3차 병원까지도 다녔었다. 그러나 그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도중에 신경인지검사에서 주의력 항목에 중등도 수행저하가 보고되었지만 진단이 바뀌거나 의사와의 면담에서 따로 다뤄지지 않았다.
기억력 등 다른 항목은 높고 주의력만 낮다. 조울증 진단을 다시 검토해 줬을 법도 한데, 나는 이 이후에도 한참을 조울증약을 퍼먹어야만 했다. 돈도 비싸게 주고 한 검사인데 이제와 생각하니 이걸 왜 시켰는지 모르겠다.
난 이 일을, 이 시기를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다. 삶에 초연한 나이가 되어서도 이따금 생각나면 사무칠 것 같다. ADHD보다 조울증이 더 안 좋은 병이라서가 아니다. ADHD가 조울증약을 먹으면 단지 삶이 너무나 망가지고, 그게 나한테 진짜 일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4년 동안.
그 시기가 정말로 어땠는지에 대해선 다음 편에 쓰려고 한다. 아주 한 맺힌 글이 될 것 같다.